올해로 고용보험이 도입된 지 20년이다. 노동시장이 불안정한 한국에서는 고용보험의 구실이 어느 나라보다 절실하다. 고용보험은 중심권 노사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기여하고, 불안정한 노동자가 주로 급여를 받는다는 점에서 노동연대 가치를 구현하는 데 제격인 제도다.

이전부터 고용보험 개혁 논의가 나오기를 바랐는데, 예상치 않은 곳에서 촉발되었다. 지난 8월6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실직한 근로자의 생활 유지를 위해 실업급여를 50%에서 60%로 올리고 지급 기간도 현행 90~240일에서 30일을 더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가 ‘저임금 노동자의 사회보험료 지원’을 꺼내고,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4대 중증질환 100% 국가 책임’을 내놓은 것처럼 민생 의제를 다루는 보수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노동계가 대통령의 카드를 받아 더 크게 굴려나가길 기대한다. 연공급 임금체계에서 대응 지형이 수세적일 수밖에 없는 임금피크제 논란은 유연히 대응하고, 대신 다수 불안정 노동자를 위한 고용보험 강화에 힘을 집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노동계에서 활동하는 지인들이 종종 말한다. ‘노동 개혁 없는 복지는 한계를 지닌다’고. 맞다. 복지는 분명히 2차 재분배 영역에 속하며,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와 황폐화를 방치하고서는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어렵다. 중요한 건 다음 질문이다. 그러한 한계를 지니는 복지는 노동에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나는 복지가 노동자에게 노동조합 같은 것이라 답한다. 헌법에 명시된 노동 3권은 과거 선배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이룬 열매이지만, 그 조항이 현재 노동자의 권리를 자동으로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노동자에게는 사용자에 맞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여러 자원이 필요하다. 당연히 핵심은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이 노동자에게 일자리까지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튼튼한 버팀목은 된다. 그래서 노동조합 있는 노동이 강하다.

복지도 그렇다. 부당한 계약해지임을 뻔히 알면서도 돌아서는 노동자에게 비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의감이 부족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계약해지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려 있다. 사용자의 전횡에 저항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크다.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가장으로서 6개월, 아니 1년도 넘을 수 있는 투쟁에 나서기 어렵다. 동료들 역시 뻔히 처지를 알기에 울분을 삼키며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만약 이들에게 6개월, 1년간 제공되는 실업급여가 있다면 어땠을까? 이 부당함을 용납지 않겠다고 가족에게, 동료들에게 6개월만 싸워보자고 나설 수 있다. 노동조합이 그에게 노동권을 엄호하듯이 실업급여 역시 그렇다. 그래서 복지 있는 노동이 강하다.

고용보험 개혁 논의를 통해 비정규직 의제를 구체화하자

현재 우리나라 고용보험은 매우 취약하다. 공식 실업자 가운데 실업급여를 받는 사람은 약 40%에 그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60%가 고용보험 밖에 있고, 하루하루가 힘든 영세 자영업자와 취업문에 들어가지도 못한 청년들은 사실상 실업급여에 접근조차 할 수 없으며, 설령 가입자라도 자발적 퇴직인 경우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급여 기간도 OECD 대부분 나라에서 1~2년인데 우리는 최대 8개월에 불과하다. 실업급여 보험료율은 선진국 대부분이 노사 합쳐 3%를 넘는데 우리는 1.3%에 머문다.

대통령의 제안은 한계를 지닌다. 기존 고용보험 가입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급여 확대도 미약하다. 여기서 주목할 건 대통령이 고용보험 개혁을 꺼냈다는 점이다. 노동계가 화답할 차례다. ‘왜 육아휴직급여까지 고용보험에서 책임져야 하느냐, 운영이 투명하지 않다’ 등 논란이 있지만 통 크게 보면 수용 가능하거나 이후 개선하면 되는 사안들이다.

불안정 노동자, 청년,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실업급여를 제공하고 급여도 강화하는 운동을 펴자. 이를 통해 ‘비정규직’ 의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전면화하고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모아갈 수 있다. 이미 청년 쪽에선 고용보험 개혁에 나서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노동계가 실업급여 강화를 위해 노사가 고용보험료를 더 내고 운영도 민주화하자며 논의를 주도하기 바란다. 불안정 노동자의 노동권·생활권을 옹호하며 노동 내부 숙제인 정규직·비정규직의 연대를 구현하는 소중한 계기가 아닌가.

기자명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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