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D(투자자-국가 간 국제중재제도)에 대한 괴담 2개가 한국을 떠돌고 있다.

첫 번째 ISD 괴담은 2011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 사회는 한·미 FTA 비준 여부로 시끄러웠다. 특히 한·미 FTA에 들어간 ISD 조항에 대한 우려가 컸다. ISD 조항을 그대로 두면, 한국에 투자한 외국인들이 자신들의 투자 수익을 저해한다고 생각되는 한국의 공공정책에 시시콜콜 시비를 걸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자 당시 이명박 정부와 보수 언론이 나서 ‘그건 괴담일 뿐이야’라고 일축했다. ISD는, 후진국 정부가 ‘자국의 영토 중 외국인 소유의 부동산’ 등을 강제로 빼앗을 때나 당한다고 했다. 한국 같은 ‘선진국’은 염려 없다는 거다.

두 번째 ISD 괴담은 최근에 등장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하고 나선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현재 삼성물산 3대 주주)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한국을 상대로 ISD를 제기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엘리엇과 시비가 붙은 건 민간 자본인 삼성인데 그 화풀이를 생뚱맞게 한국 정부에 퍼부을 것이라고 하니, 그 근거가 궁금하다. 필자 역시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 출처를 탐색해봤지만 정확한 근거는 확인 불가능했다. 추측만 무성하다.

ⓒ연합뉴스5월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ISD로 다시 보는 론스타 문제’ 토론회가 열렸다. 현재 론스타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한 상태다.

예컨대, 자본시장통합법에 따르면 주가를 기준으로 기업들의 ‘합병 비율’을 정하게 되어 있다. 엘리엇은 기업 가치가 낮게 평가된 삼성물산의 주주로서 자본시장통합법을 시행 중인 한국 정부에 시비를 걸 수 있다고 한다. 혹은 삼성물산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공단(광의의 정부기관)이 7월17일의 삼성물산 임시주총에서 반대표를 던지지 않아 합병이 성사되는 경우, 엘리엇이 한국 정부에 그 손해를 배상해달라고 나설 수 있다는 논리도 나온다.

본디 괴담이란, 출처를 알 수 없으나 사람들 입에 사실처럼 오르내리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뜻한다. 그런데 2012년 한·미 FTA가 발효된 지 채 몇 달 지나지 않아 ‘먹튀’ 론스타가 한국을 상대로 ISD를 제기했다. 물론 우리 정부가 론스타 소유의 부동산을 강제로 빼앗은 일 따위는 없었다. 론스타가 문제 삼은 것은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에 대한 승인을 지연하고 그 매각 차익 등의 수익금에 세금을 매겼다는 점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론스타가 외환카드 주가조작으로 재판을 받던 중이니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지연할 수밖에 없었다. 론스타의 매각 차익에 대한 과세 역시 실질과세 원칙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러나 론스타는 이처럼 우리에겐 정당하기 그지없는 금융·조세 정책들에 ISD를 제기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첫 번째 ISD 괴담의 경우 괴담이 아니라 근거 있는 주장이었던 것으로 판명 났다.

다행히 두 번째 ISD 괴담은 아직까지 괴담으로 남아 있다. 주가를 기준으로 회사 합병 비율을 정하도록 한 것은 한국이 엘리엇을 차별하거나 삼성에 혜택을 주기 위해 일부러 만든 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국제 기준에 어긋난 것도 아니다(22~26쪽 기사 참조). 또한 아무리 국가가 운용 주체라도 국민연금공단의 의사 결정에까지 ISD를 제기할 수 있다는 건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한국은 잘못한 게 없으니 엘리엇의 ISD 제기 또한 걱정할 것이 없다. 엘리엇의 ISD는 그저 괴담이다.

ⓒAP Photo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전 회장(위). 유코스 지분을 가진 엘리엇 측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100조원대 ISD를 제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런 괴담은 왜 나온 것일까? 현재로서는 삼성과 엘리엇 중 어느 한쪽의 언론 플레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론스타와 만수르(아랍에미리트의 왕족이자 부호) 등이 연이어 ISD를 제기하면서 한국 사회가 예민해하는 상황을 교묘히 이용한 언론 플레이다. 삼성의 언론 플레이라면, 엘리엇도 론스타 같은 ‘나쁜 먹튀 자본’이니 엘리엇에 붙으면 안 된다고 한국인 소액주주들을 설득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엘리엇의 언론 플레이라면, 국민연금에게 합병에 반대하라는 압력 또는 정부더러 이번 사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 정도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엘리엇은 헤지펀드 중에서도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소송을 통해 아르헨티나 군함과 대통령 전용기까지 압류한 전설의 ‘벌처 펀드(부실기업이나 부실채권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자금)’다. 소송뿐일까? 엘리엇은 ISD 역시 수익극대화 전략의 도구로 능수능란하게 사용해왔다.

각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활용해온 엘리엇

이쯤에서 소송과 ISD의 개념을 명백히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한국에 투자한 외국인이, 한국 정부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했다 치자.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한국 국민과 동등하게, 한국 정부가 한국 법을 어겼는지 한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ISD다. 외국인 투자자와 한국 정부가 발탁한 1명 또는 3명의 법률전문가들로 ‘민간’ 차원의 중재판정부를 구성해서, 한국 정부가 자기 나라와 한국 간에 체결된 투자보장협정(BIT)이나 자유무역협정(FTA)의 투자보호 약속을 어겼는지 판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외국인 투자자만 이용할 수 있으니 일종의 특혜다. ISD는 흔히 외국인투자자와 한국 간의 ‘소송’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이처럼 외국인 투자자는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고 외국 민간인들에게 ‘중재’를 받을 수도 있으므로, 공적인 소송과 사적인 ISD는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

엘리엇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한 ISD를 제기한 바 있다. 2003년 러시아 정부는 에너지 대기업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회장을 탈세·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유코스의 외국인 주주들은 러시아 정부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무려 100조원대의 ISD를 제기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엘리엇의 자회사 로즈인베스트코였다. 이 회사는 2010년 러시아 정부에 대해 승소했다. 물론 엘리엇이 ISD로 늘 단맛만 봤던 것은 아니다. 엘리엇의 특수목적법인(SPV) 율리시스는 2012년 에콰도르를 상대로 ISD를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2001년의 경제위기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내렸다가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수십 건의 ISD를 당한 바 있다. 그러나 엘리엇은 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현재로서는 ISD가 삼성이나 엘리엇 어느 한쪽의 언론 플레이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지만, 나중에 엘리엇이 ISD를 진짜 무기로 사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게다가 ‘론스타 ISD’의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한국 정부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 정부는 머나먼 미국 땅에서 미국 변호사들에게 수백억원 규모의 변호사 비용을 줘가며 ‘한국의 정당성’을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다. 엘리엇도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를 훨씬 넘어서는 이유를 들이대며 ISD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ISD라는 제도 자체가 존재하는 한, ISD의 공격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현재의 우리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

이처럼 ISD는 괴담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엘리엇은 곤경에 몰린 외국 정부나 기업을 공격해 돈을 뜯어내는 데는 천부적 능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엘리엇이 ISD의 가공할 위력을 활용해 한국을 약탈하겠다고 마음먹을 때, 그 파괴력의 궁극적 대상은 한국인들의 빈곤한 살림살이일 것이다.

기자명 노주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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