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어벤져스〉에 어떻게 녹아들었나
세계 곳곳 ‘그리팅맨’ 공공 미술의 ‘히어로’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2002년부터 시행한 ‘문화 원형 디지털콘텐츠화 사업’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매년 수십억원의 비용을 들여 신화와 설화 같은 우리 문화의 원형을 연구하고 이를 문화산업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정보로 재구성하는 사업이다. 이렇게 제작한 콘텐츠는 사극 〈주몽〉이나 영화 〈왕의 남자〉 등에서 시대를 고증할 때 참고하기도 하고, 게임 〈거상〉, 캐릭터 ‘뿌까’ 등의 제작에도 응용되었다. 이렇게 ‘신화가 대박이다’ 하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는데, 창조경제를 주창한 박근혜 정부에서는 축소되었다.

신화와 설화는 스토리텔링의 원형이다.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끝없이 재창조된다. 유럽 르네상스 미술 작품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많았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피라모스와 티스베’ 신화를 원형으로 한 작품이다. 할리우드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미녀와 야수〉는 ‘에로스와 프시케’를, 〈마이 페어 레이디〉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변형한 것이다.

신화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의미를 발휘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연극이 있다.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변신 이야기〉(5월17일까지)이다. 이 작품은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쓴 서사시 ‘변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극이다. 2002년 초연되었는데 “9·11 테러로 상처받은 뉴욕 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해 토니상을 비롯한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다.

영화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는 여러 캐릭터가 나오는데, 몇 캐릭터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을 연상케 한다.
〈변신 이야기〉의 작가 메리 짐머먼은 이후에도 〈오디세이〉 〈아라비안나이트〉 등 신화와 설화를 재해석한 작품을 썼다. 〈변신 이야기〉에서 그는 극중 캐릭터의 입을 빌려 현대사회에서 신화가 갖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화는 집단의 꿈이며, 꿈은 개인의 신화다. 불행하게도 요즘 우리는 우리의 신화적인 부분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엄청난 것들이 우리에게서 도망쳐 나가고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성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수수께끼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고 유익하다.”

〈변신 이야기〉는 옴니버스 형식의 연극이다. 천지창조 이야기부터 시작해 미다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에로스와 프시케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신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신들의 능력과 욕망, 사랑과 갈등을 다루는데 마치 인간 사회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변정주 연출가는 “신화는 다양한 해석과 토론을 낳는다. 이런 과정에서 신화 속 신들은 인간과 친구가 되어 우리 무의식의 단면을 바라볼 수 있는 뷰파인더 구실을 한다. 이것이 신화의 힘이다”라고 말했다.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 국가에서 신화가 살아남는 까닭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신화 속 신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래서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끝없는 욕망 때문에 갈등을 빚고 그래서 이야기의 극적 구성이 탄탄해진다.

고대의 신화 가운데 최근 들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가장 각광받는 것은 북유럽 신화다. 북유럽 신화란 주로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말하는데 ‘운문 에다(구 에다)’와 ‘산문 에다(신 에다)’를 원전으로 한다. 블리자드 사의 〈월드 오브 워 크래프트〉 게임에 나오는 주요 캐릭터들도 북유럽 신화에서 가져온 것이 많은데, 특히 판타지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원작이자 판타지 문학의 역작으로 꼽히는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톨킨 본인은 황금 반지가 등장하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다고 말했다). 〈니벨룽의 반지〉는 게르만 민족의 서사시를 재구성한 작품으로 북유럽 신화의 내용을 담고 있다. 요즘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도 이런 북유럽 신화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어벤져스〉의 토르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는 아이언맨, 토르, 헐크,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 호크 아이, 퀵 실버, 스칼릿 위치, 울트론 등이 등장하는데 이 중 토르가 바로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절대신 오딘의 아들인 그는 천둥의 신으로 풍요와 농업을 상징한다. 인간을 괴롭히는 사나운 거인에 맞서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전편인 〈어벤져스〉에 나오는 악역 로키는 토르의 이복동생으로, 북유럽 신화에서도 대표적인 ‘트러블 메이커’다.

북유럽 신화에서 세계는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신들이 사는 아스가르드, 거인들이 사는 요툰하임, 인간이 사는 미드가르드가 그것이다. 토르와 로키는 아스가르드에 사는 신이다. 영화에서 토르는 로키에게 속아 아스가르드에서 신들 간에 전쟁을 일으키고 그 죄로 추방당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도 토르는 인간계에 온 망명자의 시선으로 상황을 관찰한다.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제공연극 <변신 이야기>(위)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 ‘변신’을 재해석했다.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요소들도 포착할 수 있다. 영화에서 아이언맨은 억만장자 토니 스타크인데 그가 지은 ‘어벤져스 맨션’에 모여 있는 슈퍼 히어로들의 모습은 올림포스 신전에 모인 신들을 떠올리게 한다. 재력을 과시하는 토니 스타크(아이언맨)는 미다스, 헐크는 괴력을 지닌 헤라클레스, 호크 아이는 활의 신 아폴론, 캡틴 아메리카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떠올리게 한다.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돋보이는 점은 이런 신을 닮은 슈퍼 히어로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스 웨던 감독은 각각의 캐릭터에 목적을 부여하고 스토리를 풀어가게 하면서도 전체 이야기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원작 만화와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세계관의 확장이다. 감독은 원작의 캐릭터를 재구성해 훨씬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는데, 이 과정에서 신화적 요소의 차용이 엿보인다.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또 하나 찾을 수 있는 신화적 모티브는 ‘파괴가 곧 창조이고 선과 악이 하나’라는 인도 신화다. 3억3000명의 신이 있다는 인도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신은 창조의 신 브라흐마,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다. 인도 신화는 파괴를 재창조로 규정하고 창조-유지-파괴가 끝없이 반복된다고 말한다.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이 윤회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절대악 울트론이다. 울트론은 선과 악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선에서 악이 나오고 악에서 선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가 개발한 평화 유지 프로그램의 오류로 탄생한다. 자신의 결점을 보완해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는 능력을 지닌 그는 네트워크를 이용해 인간의 모든 기술에 접근할 수 있다.

울트론은 자신을 탄생시킨 어벤져스를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데, 그렇다고 인류를 보호하지도 않는다. 조스 웨던 감독은 “(울트론이) 한 번에 모든 것을 배우고 인터넷 정보에 접근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갈등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인류 자체가 갈등의 원인임을 알게 되고 모든 인류를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하려 한다”라고 설명했다.

선한 의도로 만든 울트론이 악의 축이 된 것처럼 토니 스타크의 사이버 집사였던 자비스는 비슷한 과정을 거쳐 울트론의 능력을 흡수하고 비전으로 재탄생해서 선을 회복시킨다(마블코믹스 원작에서 비전은 울트론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이처럼 선과 악이 혼재되어 윤회하는, 인도 신화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 이 영화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신화적 요소 차용한 ‘마블버스터’

물론 이런 신화적 요소의 차용이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흥행 비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의 캐릭터들이 만화 캐릭터 이상의 깊이를 보여주고 스토리가 개연성 있게 느껴지는 것은 신화적 요소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평이다.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회상 장면을 통해 캐릭터들의 어두운 과거를 보여주는 것 또한 신화적 요소를 강화해준다.

전편 〈어벤져스〉는 15억 달러 이상(역대 흥행 순위 3위)을 벌어들이며 ‘마블버스터(마블코믹스+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 역시 비슷한 흥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에서는 역대 외화 최단기 관객 돌파 기록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창조경제를 일으키겠다면서도 문화 원형은 등한시하는 박근혜 정부가 새겨야 할 대목이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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