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 국어사전에는 없는 신조어다. ‘선택장애’라고도 부른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쪽을 고르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리’를 뜻한다. 우유부단과 비슷하지만 그 정도를 강조할 때 주로 쓰인다. 가령 짬뽕을 먹을지 짜장면을 먹을지 결정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짬짜면이 나왔는데 다시 짬뽕, 짜장면, 짬짜면 중에서 고민하는 모양새다. 네이버 인터넷 카페 ‘레몬테라스’ ‘맘스홀릭’ 같은 유명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에도 결정장애라는 말이 자주 눈에 띈다. 주로 ‘골라주세요’ 유의 글이다. 몇 개의 제품 사진을 올리고 이 중 나은 걸 골라달라는 식이다. 가방, 구두를 비롯해 아기 이름, 거실장에 어울리는 소파, 캠핑 테이블보 색, 벽지, 이사 갈 집을 골라달라고 한다. 취업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월급이 비슷한데 각각 출퇴근 시간과 회사 분위기, 업무 강도가 달라서 장단점이 있으니 골라달라는 내용이다. 어느 식당에서는 삼겹살과 목살 중 메뉴 선택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적당히 섞여 있는 ‘결정장애 메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상견례 날 입을 속옷 색깔까지 정해달라는 사회다. 결정장애라는 커밍아웃이 앞다퉈 이어진다. 얼굴 모르는 이들이 댓글로 판단을 돕는다. 얼마 전 출간된 〈결정장애 세대〉의 저자 올리버 예게스는 2012년 독일 일간지 〈디 벨트〉에 같은 제목의 기사를 올려 반향을 일으켰다. 1982년생인 그는 스스로를 결정장애 세대라고 말한다. 특징은 이렇다. “나는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한다. 어딘가에 잘 정착하지도 못하고 한 가지 일에 잘 집중하지도 못한다. ADHD를 앓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주의력 결핍에 결단력 박약이다. 내 앞에는 너무 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이든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대체로 해결된다.” 세대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결정장애를 말하는 예게스는 그 기준을 주로 디지털 환경에 맞춘다. 이들은 텔레비전보다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친숙하고, 사생활을 보호받는 건 중요하지만 일상을 SNS에 기록하는 것에 부담이 없다. 만나본 적 없는 SNS 친구도 여럿 있고 현실의 친구들과 만나서도 종종 SNS를 뒤적거린다. 예(Yes), 아니요(No) 대신 글쎄(Maybe)라는 말을 많이 쓴다.
맛집 검색에 ‘오빠랑’ 키워드 넣는 까닭
정보 과잉의 사회에서 길을 잃는 건 특정 세대만이 아니다. 고명인씨(가명·42)는 가습기를 고르느라 몇 개월째 고심 중이다. 비교적 가격이 싼 소셜 커머스 사이트에서 물건을 찾아본 뒤 오픈마켓에 들렀다. 수백 개가 검색됐다. 판매 순위별, 평점별, 가격별로 정렬해 서너 가지 후보군을 추렸다. 그런 다음 각 제품에 대한 후기를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했다. 비교적 자세하고 친절했다. 후기를 읽다가 이걸 사야겠다고 마음이 기울 무렵 마지막에 흐린 글씨로 쓰인 ‘이 글은 업체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제품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후기를 쓰게 한 경우였다. 뭔가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구입을 포기했다. 검색이 검색을 낳았다. 고씨의 일상에서 즉흥적인 선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테드(TED) 콘퍼런스의 창시자 리처드 워먼은 평일 하루치 〈뉴욕 타임스〉 기사가 17세기 평균적인 영국인들이 평생 접하는 양보다 많은 정보를 싣고 있다고 말했다. 정보가 많으면 의외로 선택은 어려워진다. 정보 과잉과 결정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있다. 2008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펴낸 〈미디어 과잉과 사회의 불확실성의 증가〉 보고서를 보면 “정보 과잉을 경험한 사람들은 의사 결정을 유보하거나 많은 정보로 인해 분석력 저하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에 노출되면 사람들의 분석 능력이 낮아지고 이를 통해 자신의 결정이 멈춰질 수 있다”라고 한다. 제품 구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온라인 리뷰에서도 지나친 정보 제공은 판매에 역효과를 줄 수 있다. 정보량이 증가할수록 이를 처리해야 하는 구매자에게는 부담이 되기 때문에 정보처리 능력을 넘어서는 방대한 양의 정보는 제품 구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보고서에서는 질적으로 낮은 정보의 과잉 현상을 ‘데이터 스모그’라 지칭한다.
김씨의 경우처럼 스스로의 결정을 방해하는 요소로 스마트폰을 꼽는 사람이 많다. 수많은 가짓수를 놓고 저울질하는 용도로 쓰인다. 〈결정장애 세대〉에서도 이렇게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예전에는 방향을 찾고 싶을 때 나침반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을 이용한다. 스마트폰은 나침반이자 내비게이션인 동시에 중앙관제탑이자 항해일지다. 한때 인터넷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듯 이제 스마트폰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늘 온라인 상태다.’
지난해 방송통신위원회의 ‘스마트폰 이용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스마트폰 이용자의 약 77%는 ‘특별한 이유 없이 스마트폰을 자주 확인한다’고 답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라고 답한 사람은 29.4%다. 스마트폰을 통한 인터넷 이용 시간은 하루 평균 1시간42분이다. 온라인 리서치 업체 ‘패널나우’ 역시 회원 3만여 명을 대상으로 스마트폰으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25%가 ‘인터넷’을 1위로 꼽았다. 2위가 애플리케이션 이용(23%), 3위가 게임(12%), 4위가 문자 메시지(11%)였다. 기본 기능인 통화는 4%로, 시계 보기(6%)에도 미치지 못했다.
망설이지 말고 차라리 우연에 기대보라
6년차 직장인 김신애씨(31·가명)는 언제부터인지 자주 오르내리는 결정장애라는 말이 불편하다. 손쉽게 ‘장애’라는 말을 붙이는 무신경도 그렇지만 직장 상사가 그 말을 자주 쓰면서 결정을 미루는 게 거슬린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처럼 사소한 게 아니라 일을 할 때 그렇게 나오면 당황스럽다. 결정을 다른 사람한테 미루거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말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러는 본인 역시 지난 결정에 대해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이다. ‘다른 전공을 선택했더라면’ ‘다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하는 후회다.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레나타 셀레츨은 김씨처럼 선택에 어려움을 겪거나 이미 내린 결정에 후회하는 이들에게 조언한다. “선택을 할 수 없을 때는 간혹 우연에 기대는 것이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된다.” 최근 출간한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개인이 자기 삶의 세세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고 말한다. 선택하는 건 어차피 개인이 아니라는 의미다. “선택 이데올로기의 역설은 현실에서 선택의 여지가 점점 더 줄어든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한 게 자기 잘못이라고 믿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결정에 몰입하느라, 정작 사회를 변화시키는 선택에 대해서는 잊게 된다는 우려도 덧붙였다.
심리학 칼럼니스트 강현식씨는 결정장애의 해결책은 ‘자기 확신’이라고 말한다. “선견지명의 반대말로 ‘후견편파’라는 말이 있는데 결과론적 사고방식이다.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또다시 결정장애를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지나고 보면 명확해도 그때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어떤 걸 원하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더 그렇다. 한계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부분에서만 책임지면 된다.”
〈결정장애 세대〉는 〈해리 포터〉 속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교장 앨버스 덤블도어의 말로 마무리한다. “우리가 지닌 능력보다는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 반면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새뮤얼 존슨의 말로 시작한다. “어떤 인생을 선택할까 궁리하느라 실제 살아가는 일 자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