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가보면 가장 아쉬운 것이 환자와 의사의 소통이다. 환자의 증상과 그 증상에 따른 치료법만 얘기할 뿐, 그 병의 근원이 무엇인지, 환자가 평소에 어떤 생활을 하는지, 생활습관에 따른 적절한 대처법은 무엇인지 따위, 폭넓은 소통은 이뤄지지 못한다.

한의사 강용원씨는 환자와의 소통이 치료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환자가 지겨워할 정도로 문진을 길게 한다. 처음 방문하면 1시간30분 정도 진료한다. 특별한 도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문진 시간만 그렇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울증에 걸린 환자가 있다고 치자. 그는 자존감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대처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상생활과 연계해서 풀어야 한다. 그래야 온전히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여는 일이다. 환자가 자신을 내려놓을 때 그는 의학 지식을 한쪽에 밀쳐두고 경청한다. “예전에는 내가 알고 있는 의료 지식의 틀에서 환자를 진단하려 했다. 그 틀 안에서만 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틀을 버리고 환자를 만난다. 환자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처음 40~50분은 답답함을 느끼지만 서서히 틀이 깨지면서 듣고 싶은 답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가〈/font〉〈/div〉강용원씨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현대인의 특효약이라고 말한다.
ⓒ사진가 강용원씨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현대인의 특효약이라고 말한다.
법학과 신학을 겸비한 늦깎이 한의사

그가 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비결은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다. 늦깎이 한의사인 그는 이력이 독특하다. 20대에는 법학도로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법체계를 공부했다. 30대에는 신학도로서 종교를 연구했다. 40대에는 한의학도로서 한의학을 연마했다. 책을 읽어보면 그런 다양한 경험이 다양한 관심으로 뻗쳤음을 느낄 수 있다. “법을 통해 사회과학적 접근법을, 신학을 통해 인문학적 접근법을, 한의학을 통해 자연과학적 접근법을 익혔다고 볼 수 있다. 오랜 방황의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통섭적’ 치료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환자를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치료하면서 갖게 된 인문학적 관심을 책으로 묶었다.”

치료의 영역에서 인문학의 영역으로 관심이 뻗어갔지만 그는 역으로 인문학의 영역에서 치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은 경계한다. 특히 철학자 강신주씨와 법륜 스님의 치유형 상담에 이의를 제기한다. “강신주는 산파술을 예로 들면서 출산은 산파가 아니라 산모가 아픈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산파는 산모를 아프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승려 법륜의 즉문즉설도 상처를 덧나게 해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상담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만 옳다. 실존적 고뇌에서 초래된 병과 실제적 증상으로서의 병은 치료법이 달라야 한다. 이런 방법이 해가 되는 환자도 있는 것이다. 철학 치료의 대상은 두뇌작용이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들에게 상처받고 치료받으러 온 사람을 치료한 적이 있었다.”

책을 읽어보면 ‘재야의 고수’라는 말이 연상될 정도로 각 분야에 두루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소실점이 있는데, 바로 원효다. 그는 각종 정신장애를 겪는 현대인들에게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 특효약이라고 권한다. “우울증 환자와 불안장애 환자의 본질은 갈등을 피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쟁(싸움)이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화(평화)를 위해 쟁을 피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라는 것을, 쟁의 목표가 화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긍정이 참 긍정이려면 불가피한 현실로서 아픔도 긍정해야 한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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