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이탈리아가 보여준 ‘생존 방정식’
  • 전혜원 기자
  • 호수 349
  • 승인 2014.05.21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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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 일본의 페리 아리아케호와 이탈리아의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침몰 사고가 ‘유사 사고’로 주목 받았다. 두 사고는 훈련된 선내 대응과 공적 구조가 결합될 때 희생이 최소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다른 나라의 두 해양 사고가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아리아케호와 이탈리아의 코스타 콩코르디아(Costa Concordia)호 침몰 사고다. 아리아케호는 세월호와 같은 조선소에서 만든 배인 데다, 한국의 청해진해운에 배를 매각한 마루에이페리 사 소속이다.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경우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 수백명을 뒤로하고 탈출한 장면이 세월호와 겹쳤다. 이탈리아에서는 현재 프란체스코 스케티노 선장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유사 사고’로 분류되는 이들 두 사고와 세월호 침몰은 희생자 수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아리아케호는 승객 7명과 승무원 21명 전원이 무사히 구조됐다. 사고 당일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에 오른 4229명(승객 3206명과 승무원 1023명) 중에서는 32명이 사망했다. 세월호 탑승자 476명 중 사망자 수는 284명(5월16일 기준)이다. 승객이 적고 배 기울기가 덜했거나(일본) 해안 가까이에서 사고가 났던 것(이탈리아)을 고려하더라도, 사고 뒤 대응이 희생자 차이를 만든 결정적 요인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과 이탈리아 정부에서 낸 조사 보고서, 세월호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세 여객선 사고의 시간대별 대응을 살펴봤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목포해경 제공</font></div>해경이 구조한 세월호 선내 생존자는 0명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코스타 콩코르디아호에서는 승객 4000여 명이 구조되고 32명이 사망했다.

사고 발생 후 전원이 구조된 아리아케호 선사는 세월호를 청해진해운에 매각한 회사다.

 상황을 공유하니 전원이 구조됐다

아리아케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직후 선장과 승무원의 대응을 보면, 평소 매뉴얼과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2009년 11월13일 새벽 5시6분 도쿄에서 가고시마를 향해 운항하던 여객선 아리아케호(7910t)가 왼쪽 선미에 파도를 맞아 갑자기 오른쪽으로 25° 기울었다. 1등 항해사와 갑판부원이 조타실 우현 쪽 벽으로 팽개쳐졌다. 제자리로 돌아오려 해도 바닥이 물에 젖어 발이 미끄러졌다. 컨테이너를 고정한 체인이 끊어져 화물이 쏠린 데다 파도가 더 치면서 기울기는 40°까지 올라갔다.

5시14분께 가까스로 승무원들이 제자리를 찾았고 하나둘 조타실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때 선장은 자신이 총지휘를 맡아 조타, 연락, 승객 안내 등 각 승무원에게 역할을 분담했다. 5시20분 배가 30~35° 기운 것을 안 선장은 5시22분 구조 당국인 해상보안청에 헬리콥터 구조를 요청하고 국제 VHF무선전화장치로 조난신호를 보냈다. 또한 승객과 승무원에게 배의 상황과 해상보안청에 구조를 요청한 사실을 선내 방송으로 설명하면서 구명조끼를 입을 것을 지시했다. 5시30분 승무원들이 선장 지시로 승객 전원의 안전과 구명조끼 착용을 확인했고, 5시40분 승객들을 갑판 쪽 통로로 안내했다. 7시4분 도착한 해상보안청 헬리콥터에 승객 7명 전원이 가장 먼저 구조됐다. 끝까지 배에 남은 선장과 승무원 6명은 10시21분 마지막으로 구조됐다.

   

 
사고 발생부터 구조 요청까지 16분이 걸렸고, 신고로부터 승객 전원이 구조되기까지는 2시간20분이 걸렸지만, 배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6시 전에 승객을 갑판 쪽으로 모두 대피시켰기에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 국토교통성이 사고 2년 뒤인 2011년 펴낸 선박사고 조사 보고서는 선사가 안정적으로 화물을 고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도, “비상배치표의 작성 및 조련 실시로 선장의 총지휘에 따른 체제가 구축돼 있었기 때문에 비상시 대응이 조직적으로 행해진 점”과 “승객 및 승무원에게 현재 상황과 구조 요청에 대해 설명한 점” “구조가 실시될 때까지 선체 경사가 비교적 안정돼 있어 선내가 패닉에 빠지지 않은 점” 등이 피해가 커지는 것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참사’라는 이름이 붙은 나머지 두 사고에서는 달랐다. 조직적 대응은커녕 ‘거짓 방송’이 대피를 지연시켜 화를 키웠다. 이탈리아의 호화 여객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11만4147t)는 2012년 1월13일 밤 9시45분 토스카나 제도 질리오 섬 근처에서 암초와 충돌한 뒤 곧 정전됐다. 항로를 벗어나 해안선 가까이 운항한 게 화근이었다. 9시48분 무렵, 배 왼쪽에 구멍이 생겼고 침수가 시작됐음이 확인됐지만, 선내 방송은 승객들에게 “정전이 되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라고만 했다. 승객 가족의 신고가 있었음을 전해 듣고 리보르노 해안경비대가 선장에게 연락한 밤 10시12분(사고 발생 27분 뒤, 객실 침수 확인 12분 뒤) 무렵에도 선장은 “정전이 됐고 배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라고만 답했을 뿐 어떤 구조 요청도 하지 않았다.

배가 구조당국에 ‘구멍’의 존재를 처음 보고하며 도움을 요청한 것은 그로부터 13분여 뒤. 사고가 발생한 지 40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이 배가 ‘퇴선 명령’을 내린 것은 사고 발생 1시간9분 뒤였다. 신고 뒤 바로 선내 방송으로 상황을 설명한 아리아케호 선장과 대비된다. 최근 스케티노 선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당시 승객 이바나 코도니 씨는 “선원들이 우리에게 객실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8분 급변침하면서 침몰하기 시작한 세월호는 8시55분 담당 기관인 진도 VTS가 아닌 제주 VTS에 첫 신고를 했다. 사고 발생 7분 뒤다. 그러나 9시에 제주 VTS가 ‘퇴선 준비’를 지시하자 “사람들 이동이 힘들다”라고만 답하고 이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 세월호는 침몰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세요”라고 안내방송을 했다.

진도 VTS와의 교신에서도 “선장이 최종 판단해 승객 탈출을 결정하라”는 말에 “지금 탈출하면 바로 구조할 수 있느냐”라고만 물었다. 9시38분을 마지막으로 세월호와의 교신은 끊겼다.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세월호가 끝까지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본다. JTBC가 보도한 단원고 학생이 찍은 영상에는 학생들이 “지하철도 그렇잖아. 안전하니까 좀만 있어달라고 했는데, 진짜로 좀 있었는데 죽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짓 방송뿐 아니라 책임자가 배를 버리는 장면도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와 세월호에서 똑같이 벌어졌다. 선장 스케티노는 사고 발생일 밤 11시19분 부선장에게 대피를 돕는 걸 맡기고 갑판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사고 발생 1시간34분 만이다. 선장이 떠나고 13분이 지나자 부선장도 갑판을 떠났다. 300명이 여전히 배에 남아 있을 때였다.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은 사고 발생 1시간도 채 되지 않은 오전 9시46분쯤 구조됐다.

 ‘47분 미스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

세월호와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참사 사이를 가른 것은 구조당국의 대처였다. 여러 단위에서 각종 대책본부만 가동될 뿐 정작 구조작업은 ‘늑장’과 ‘혼선’ 일색이었던 한국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구조작전은 철저하게 리보르노 해안경비대가 지휘를 맡았다. 리보르노 해안경비대는 프라토 경찰서가 전해준,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승객의 어머니가 신고를 했다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10시12분 무렵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선장에게 전화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세월호의 이준석 선장(왼쪽)과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스케티노 선장(오른쪽)은 ‘닮은꼴’이다.

이때 선장은 배의 위험에 대해 전혀 보고하지 않았지만, 리보르노 해안경비대는 오전 10시16분 다른 이유로 근처에 있었던 경비정 G104에게 즉각 이동해 콩코르디아호의 상태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사실상 배의 공식 신고 없이 구조당국의 작전 준비가 개시된 것이다. 경비정 G104는 10시39분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해군 부대였다. 10시26분에야 배가 처음으로 구조 요청을 했을 때, 리보르노 해안경비대는 이미 작전 가동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리보르노 해안경비대는 계속 배와 연락하며 구조작전을 진행했고, 퇴선 명령을 내리라고 지시해 구조작전을 지휘했으며, 이탈리아 해안경비대와 해군 부대, 다른 정부 부처 및 민간 부대의 개입을 지시했다. 구조작전에는 경비정 25척과 선박 14척, 예인선 4척, 헬기 8대가 동원됐다. 이튿날 새벽 6시17분까지 진행된 초기 구조작전에서 구조당국은 4194명을 구조했다. 이 중 리보르노 해안경비대의 직접 지시 아래 개입한 구조 부대들이 3분의 1에 달하는 1270명을 구했다. 특히 퇴선 명령 뒤 5시간 만에 탑승자 수천명 중 40~50명만 배에 남았다. 사고 사흘째인 1월15일 생존자 3명이 추가로 구조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펴낸 보고서는 리보르노 해안경비대와 다른 유관기관의 정보 공유가 빠르고 효율적이었으며, 수색 전문 인력의 수와 분포가 응급 상황을 처리하기에 충분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비극적 사고임에도 희생자 수가 비교적 크지 않았으며, 사망자 대부분이 배에서의 비상 대응 실패로 사망했다고 짚었다.
사고 발생 45분 만인 오전 9시30분 현장에 도착해 단원고 학생이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 10시17분까지 선내 진입 및 대피 방송을 제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선장과 승무원을 구해 ‘47분’의 미스터리를 남긴 한국 해경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 “당장 배로 돌아가 보고하라”

세월호는 선내 대응은 물론 공적 구조에도 실패했다. 이런 대조는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침몰 사고 뒤 리보르노 해안경비대장 그레고리오 데팔코가 영웅으로 떠오른 데서도 잘 드러난다. 사고 다음 날 새벽 0시42분,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하는 스케티노 선장에게 데팔코 대장이 “당장 배로 돌아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내게 보고하라. 이건 명령이다.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라고 단호히 촉구하는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그는 ‘국민 영웅’이 되었다. ‘어서 배로 돌아가, 멍청아’이라고 적힌 티셔츠가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영웅 호칭을 거부했다.

세월호 사고는 이런 공적 영역에서의 영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악한 선장’이 배를 버리더라도 그 탈출을 막고 끝까지 시민을 포기하지 않는 ‘의로운 공직자’가 세월호 사고에는 없었다. 오히려 해경은 선장과 승무원의 탈출을 도운 셈이 되었다. 9시40분 해양수산부 중앙사고수습본부, 9시45분 안전행정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가동됐지만 구조자 수를 오락가락한 것 외에 실제 성과는 없었다. 해양수산부는 배가 침몰한 뒤인 11시20분에 올린 청와대 보고 3보에서 “인명 피해 없음”이라고 쓰기도 했다. 또 사고 당일 실제로 투입된 잠수부 수는 16명에 불과했다. 그 결과 침몰 직전까지 배 밖에 나와 있던 172명을 구조한 것 외에는 단 한 명도 추가로 구조하지 못했다.

배의 상황을 정확히 알리고 가장 먼저 승객을 갑판 쪽으로 대피시킨 아리아케호, 선장이 위험을 숨기고 뒤늦게 퇴선 명령을 내린 뒤 도주했지만 구조당국이 조직적으로 작전을 수행해 피해를 줄인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사례는 훈련된 선내 대응과 현장에 기반한 공적 구조의 결합이 희생을 최소화하는 최선의 길임을 보여준다. 원통하게도 세월호에는 둘 다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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