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게? 남영호? 말 마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제주에서 나이 지긋해 보이는 이들에게 “남영호 사고를 기억하느냐?”라고 말을 붙여보면 예외 없이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어떤 이는 44년 전 사건 현장을 찾아온 취재진을 신기해하면서 “세월호 땜에 그럼수꽈?”라고 되묻기도 했다.

남영호는 부산과 제주를 오가던 362t급 정기 여객선 이름이다. 1970년 12월14일 오후 5시 서귀포항을 출발해 성산항을 경유해 부산으로 향하던 중 15일 새벽 1시27분경 전남 여수시 소리도 인근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선원을 포함한 총 탑승객 338명 중 생존자는 고작 15명(탑승객 수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머지 323명이 사망 또는 실종한 남영호 사고는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발생한 최악의 해난 사고로 기록돼 있다.

지난 5월15일 검찰이 세월호 이준석 선장 등 선원 4명을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하면서 남영호 사고가 다시금 화제로 떠올랐다. 당시에도 사고를 낸 남영호 선장이 살인죄로 기소된 바 있기 때문이다. 선장 강태수씨(당시 53세)는 배가 뒤집히는 순간 탈출해 바다를 표류하다 15시간30분 만에 구조된 바 있다. 승객들에 대한 탈출 지시는 전혀 없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했다. 제주 사람들이 세월호 사고를 보며 남영호를 떠올리는 것은 비단 이 때문만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사고 원인이나 사고 처리 과정에 이르기까지 두 사건이 너무나 빼닮았다”라고 제주 출신인 장명봉 국민대 명예교수(북한법연구회장)는 말했다.
 

ⓒ중앙포토1970년 12월15일 서귀포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가던 남영호(위)가 여수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실종자 300여 명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과적, 선박 불법 개조 등 사고 원인부터 그랬다. 남영호가 서귀포항에서 출항한 12월14일은 나흘 전부터 이어진 폭풍주의보가 막 해제된 날이었다. 항구에 발이 묶여 있던 이들은 너도나도 배에 짐을 싣고자 했다. 본격적인 감귤 철을 맞아 육지에 내다팔려는 밀감만 1만942상자였다. 채소도 화물차 3대 분량이 실렸다. 연말을 맞아 부산으로 친척 등을 만나러 가는 인파도 몰렸다. 훗날 검찰은 이날 남영호가 실은 짐이 500t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허가된 적재량 130t을 3배나 넘긴 수치였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그 결과 남영호는 “서귀포를 출발할 때부터 배가 좌측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였다. 그런데도 중간 기항지인 성산항에서 또다시 사람과 화물을 태운 것이다. 일부 승객이 불안해하자 선원들은 “항해를 하면 괜찮다”라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그렇다면 선장·선원이나 해운회사는 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선장 강태수씨는 출항 당일 가득 쌓인 짐을 보고 사무장과 항해사에게 “(이러면) 배가 갈 수 없다. 너희들이 책임감이 있는 놈들이냐. 빨리 짐을 내려라”며 화를 냈다고, 훗날 법정에서 주장했다. 그런데 항해사 등이 “누구 짐은 싣고 누구 짐은 안 실었다간 우리가 맞아죽는다” “날씨가 좋으니 문제없을 것이다”라며 출항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시사IN 이명익서귀포항.


과적, 선박 개조, 정부의 한심한 대응 판박이

하지만 남영호의 과적은 이날만의 ‘예외’가 아니었다. 남영호는 짐을 싣는 창고(하창)를 1개 설치하는 것으로 운항 허가를 받은 배였다. 그런데 선실 2개를 하창으로 불법 개조해 사실상 반화물선이나 다름없이 많은 짐을 싣고 다녔다. 심지어 사고가 나기 2년 전 남영호는 배 밑바닥에 넣고 다니던 돌멩이 중 한 트럭분을 빼버리기도 했다. 이 돌은 평형수(平衡水)처럼 배의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선박 복원력을 높여주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더 짐을 싣기 위해 이를 덜어낸 것이다. 그 결과 남영호가 파도를 피해 방향을 트는 순간 복원력을 잃고 뒤집혀버린 것이다. 교통부에 신고한 용적량 130t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선원들은 해운회사 측이 “항상 300t까지는 실으라”며 자신들을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로 다투다 사고 직전 남영호를 그만둔 선장도 있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선원들은 그 배후에 남영호 선주이자 남양상선 대표인 강우진씨(당시 32세)가 있다고 지목했다. 해운회사 직원들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불평하면 사장이 당장 그만두라고 하니 도리가 없었다”(당시 영업과장의 법정 진술)는 것이다. 그러나 남영호의 과적은 단 한 번도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된 일이 없었다. 선주인 강씨 일가가 해운회사 외에 미곡상·양조장 등을 운영하던 서귀포의 대표적 유지였던 까닭에 이를 두고 정경유착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남영호 사고 직후인 1970년 12월23~29일 열린 남영호 침몰사건 진상조사를 위한 국회 특별위원회에서 당시 신민당 소속이던 김수한 의원은 “남영호 선주가 권력층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말단 경찰관으로서 함부로 이 배에 손을 댔다가는 마치 고압선에 감전사를 하듯 정치적 감전사를 할 가능성이 있다. …이래가지고 실질적으로 단속을 못했다는 얘기가 허다하다”라며, 경찰 고위층에 대한 뇌물 상납 의혹을 철저히 수사할 것을 촉구했다.

 

 

 

 

 

 

사고 이후 정부의 한심한 대처도 이번 세월호와 닮은꼴이었다. 사고가 난 직후 남영호는 긴급 구조신호(SOS)를 타전했지만 인근 해상 무선국 어느 곳도 이를 수신하지 못했다. 그나마 신호를 수신한 것은 일본 어선이었고, 이들이 오전 8시34분 일본 순시함 구사가키호에 이를 알린 결과 조난 사실이 한국에 전해졌다.

그뿐 아니다. 해경은 이날 오전 11시께 일본 언론에 뜬 뉴스를 본 국내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요청할 때까지도 사고가 난 배가 여객선인지 어선인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측은 이날 오전 한국 해경 등에 계속해서 ‘긴급사태 발생’을 타전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해경 함정이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것은 사고 발생 14시간 만인 이날 오후 3시35분. 구조한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일본 선박이 8명, 민간 어선이 1명을 구조한 뒤였다. 사고 이후 해경은 남영호 무선설비가 낡고 출력이 약해서 구조신호를 수신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더 멀리 떨어진 일본 어선에서도 이를 수신했다는 점에서 이는 변명이 되지 못했다.

사고 대처는 늦었으되 여론 무마 시도는 재빨랐다. 사고 발생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정부는 더 이상의 시신 인양이 어렵겠다고 발표했다. 사고 해역 수심이 80~90m로 잠수사들의 작업 범위를 벗어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선체 인양도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대신 정부는 당시 돈 120만원을 들여서 위령탑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유족들은 격노했다. 12월28일 서귀포에서 정부가 주최한 합동위령제에서는 유족들이 “시신도 없는데 무슨 위령제냐”라며 제단을 뒤엎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직전에는 부산 지역 유족들이 당국의 늑장 대응을 성토하며 해운국과 파출소를 습격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자 경찰은 “이들이 정확한 유족명부 작성 등을 반대하고 있는 점을 중시, 사이비 유족이 끼어 있지 않나 보고 조사 중이다”라고 밝혔다(〈동아일보〉 1970년 12월22일자). ‘사이비 유족’ 시비는 이때부터 등장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남영호 사고로 인양된 시신은 고작 18구다(1971년 부산지방해양심판원 자료). 나머지 300여 명의 유족은 시신 없이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이 평생 한이 됐다”라고 유족들은 말한다. 시신을 찾은 유족도 가슴에 피멍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고 일주일 만에 대마도에 떠내려간 어머니 윤숙이씨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는 나종열씨(65·남영호 조난자 추모사업을 위한 유족대표회 회장)는 “시신이 수습되는 대로 광목천에 싸서 서귀포항에 한 줄로 늘어놓은 다음 가족들로 하여금 신원을 확인케 했다. 월남전 상황도 아니고 어떻게 죽은 사람을 그렇게 대접할 수 있나”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유족들의 저항은 길지 못했다(4·3 사건으로 가족 잃고, 남영호 침몰까지 참조).

 

 

 

 

ⓒ시사IN 이명익중산간 일대로 옮겨진 남영호 조난자 위령비를 20여 년 전 발굴한 조인석 원장(우산 쓴 이)은 인적 드문 산길에 비석과 무덤들이 외롭게 방치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남영호와 세월호의 닮은꼴 전개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44년 전 남영호 유족들은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기소돼 사형이 구형됐던 선장 강태수씨는 금고 3년형을 살고 풀려났다. 당시 재판부는 “선박이 전복되면 자기 자신의 소중한 생명부터 빼앗길 것이 뻔한 마당에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사고 발생을 예견하면서까지 과적 운항을 하였을 까닭이 없다”라며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선주 강우진씨에게 적용된 살인방조죄도 “기만원의 운임 이익을 얻으려고 1억5000만원 상당의 선박 재산이 수장될 것을 예견했을 이치가 없다”라는 이유로 기각됐다. 다만 1심 재판부는 선주 강씨가 과적을 지휘한 책임을 인정해 과실치사죄를 적용했는데, 항소심에서는 이조차 뒤집혔다. 대법원은 강씨가 과적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강씨는 재판 과정에서 “나는 아버지의 보좌 역할을 했을 뿐이다”라며, 당시 유족들이 남영호의 실질적 선주로 의심하던 그의 아버지(68)에게 책임을 미루기도 했다.

선주 강씨는 1975년 제주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다시 한번 입길에 올랐다. 사고 직후 보험금만으로 유족 배상금 1억여 원을 마련하기 어렵게 되자 강씨는 자기가 소유한 땅 7000여 평(약 2만3000㎡)을 제주도에 내놓으며 이를 팔아 배상금으로 써달라고 했다. 그런데 출소 이후 이 땅을 되찾겠다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강씨는 다만 고향 땅을 다시 밟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남영호 사고 당시 남양상선 직원으로 근무했던 김 아무개씨(75)는 “강씨 형제가 셋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타지에 있다. 강우진씨도 일본·부산 등을 떠도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강씨 집안을 잘 안다는 한 지인은 “서귀포 전체가 아는 사람인데 어떻게 고향에서 고개를 들고 살 수 있었겠냐”라며 혀를 찼다.

박정희, “공무원 기강 잡아 경제개발 차질 없게”

법원은 직무유기로 기소된 해운국 공무원과 해경 등 4명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이 과적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고 무선을 못 받은 것은 인정되지만, 고의로 직무를 유기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고 직후 검찰이 고위 공무원과 해운회사 간의 유착 고리, 정부의 늑장 대응 사유 등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채 이들 말단 공무원만 기소했을 때 언론들은 “‘송사리’만 잡고 수사 매듭”이라며 비웃었다. 그런데 이들 송사리마저 무죄로 풀려난 것이다. 정부 각료 중 사고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가 있기는 했다. 당시 교통부 장관을 지내던 백선엽씨다. 그러나 백씨는 그 뒤 한국종합화학 사장, 한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등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권력의 신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행보였다.

남영호는 세월호가 넘어야 할 산이 아직 첩첩임을 예고한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할 때 비극은 되풀이된다. 그 사이 재난구호 체계는 남영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졌다. 구난 노하우 또한 축적됐다. 그러나 이윤 앞에 생명은 뒷전인 자본, 이를 비호하는 권력, 가해자에게 관대한 사법·행정 시스템이 결합할 때 비극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음을 이번 세월호 참사는 보여준다.

그 정점에는 여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통(不通)의 리더십이 있다. 남영호 사고가 나고 보름 뒤인 1970년 12월30일 서울대에서는 제주 출신 학생 30여 명이 모여 성명서를 낭독했다. 당시 법대 3년생이었던 장명봉 교수 외 강창일(현 국회의원)·박귀환(현 국민대 교수)·양창수(현 대법관)·현상철(현 기업인) 등이 참여한 성명서에서 학생들은 “남영호 사건은 단순한 과실이 아니고 근대화 과정에서 빚어진 인명 경시 풍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971년 1월8일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남영호 사건에 대해 이렇게 공식 언급을 남겼다. “남영호 사건은 관계 공무원의 기강이 해이된 데서 일어났다. 공무원의 부정부패도 나쁘지만 더 나쁜 것은 기강 해이이므로 기강을 바로잡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하라.”

 

기자명 제주·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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