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6일 밤 9시 임수혁군(가명·17)의 아버지 임진명씨(가명·44)는 25t급 어업지도 행정선에 올라탔다. ‘제대로 수색하고 있느냐’며 항의한 학부모 20여 명도 함께 올랐다. 구명조끼가 부족해서 늦게 탄 학부모는 맨몸이었다. 진도 팽목항에서 출발한 행정선은 사고 현장인 병풍도 북쪽 3.3㎞ 해상까지 달렸다.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2시간 가까이 내달렸다. 배에 탄 학부모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둠만 응시했다. 조명탄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탄 불빛 사이로 침몰한 배의 끄트머리만 보였다. 배가 보이자, 임씨를 비롯한 학부모들은 통곡했다. “별아~ 별아” 하고 실종된 자녀의 이름을 부르다 목놓아 울고, 울다 또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다. “얼마나 무서울까”라며 꺼이꺼이 우는 학부모도 있었다. 임씨는 ‘수혁아’ 하고 카카오톡(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시사IN 조남진“얼마나 무서울까” 4월16일 사고 해역으로 나간 학부모들이 조명탄 불빛 사이로 세월호의 끄트머리가 보이자 자녀의 이름을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4월17일 새벽 1시 임씨는 학부모들과 함께 팽목항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한 학부모가 진도 실내체육관에 있는 실종자 가족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배 안에 있는 아이가 친구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 오락실에 4명이 살아 있다는 내용을 알려주었다(4월17일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실종자 전체의 휴대전화 이용 내역을 확인한 결과, 침몰 사고 이후 이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생존 가능성이 알려지자, 배 안은 술렁거렸다. 학부모 20여 명이 동시에 휴대전화를 꺼내 각자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답은 없었다. 임씨는 돌아오는 배 안에서 아들 수혁이와 그동안 나눈 카톡 대화를 다시 보았다.

4월15일 저녁 7시22분 수혁이는 임씨에게 카톡 사진을 보냈다. 안개에 싸인 채 정박 중인 세월호 사진이었다. 수혁은 “안개 때문에 못 갈 수도 있다”라며 배 안팎 사진 4장을 보냈다. 임씨는 장손이자 외동아들 수혁이가 걱정이 되어 평소보다 자주 아들과 카톡으로 대화를 했다.
수혁이는 수학여행을 떠나는 이날도 평상시와 똑같이 아침 8시까지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갔다. 4교시까지 수업을 하고 오후 4시30분께 인천항으로 출발했다. 수혁이와 단원고 학생 325명 등 476명이 탄 세월호는 밤 9시에 인천항을 출발했다. 수혁이는 배 안에서 저녁을 먹고, 저녁 8시20분 임씨에게 ‘야구를 보고 있다’며 선실 텔레비전 화면이 찍힌 카톡을 보냈다. 밤 11시7분 ‘아까 폭죽 터질 때, 사진 찍으려고 했는데 너무 바람이 세고 추워서 못 찍었어’라며 ‘낼 찍을게’라는 문자를 보냈다. 임씨는 ‘몇 시에 잠자? 수혁아’라고 물었다. ‘좀 있다 잘 거 같아’라는 문자에 이어 제주도에 ‘낼 11시 도착’이라는 문자가 왔다. 임씨는 ‘알았어 잘 자’ ‘보고 싶다 우리 애기’를 잇달아 보냈다.

4월16일 아침 6시57분 전날 아빠 문자를 그제야 확인한 수혁이는 보고 싶다는 문자에 ‘me too’라고 답했다. 임씨는 곧바로 ‘일어났어?’라고 물었다. 오전 8시45분, 침몰 신고가 접수되기 10여 분 전 수혁이는 갑판에서 찍었던 사진을 임씨에게 보냈다(이때 바로 찍어서 보냈는지, 찍은 사진을 실내에서 보냈는지 아빠는 확인할 길이 없다). 8시46분 임씨는 ‘아침 먹었어?’라고 물었고, 곧바로 수혁이는 친구와 함께 갑판에서 찍은 사진을 또 보냈다. 임씨는 아침 8시50분 ‘사진 찍을 때 온몸이 다 나오게끔 찍어야지. 신발까지’라고 보내자, 수혁은 8시52분 친구와 찍은 사진을 다시 보냈다.

그 3분 뒤인 8시55분 세월호 선장은 “해경에 연락해달라. 본선이 위험하다. 지금 배가 넘어갑니다”라며 제주관제센터에 알렸다. 오전 9시4분 임씨는 수혁이에게 전화를 했다. 수혁이는 “아빠 배가 기운다”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임씨는 “구명조끼부터 챙겨 입어라”고 말했고, 수혁은 “챙겨 입었다”라고 답했다. 아들과 통화하는 사이, 움직이지 말라고 크게 말하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전화를 끊은 수혁이는 9시15분 구명조끼를 입은 사진을 보냈다. 배가 완전히 기울어 바닥에 등을 붙이고 벽에 발을 대고 선 모습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지시에 따라 수혁이는 친구들과 질서정연하게 추가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불은 켜져 있었다. 이것이 아들과 마지막 교신이었다. 오전 9시32분 임씨는 ‘수혁아 괜찮아?’라고 카톡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그 시각, 배는 60°로 기울어 가라앉고 있었다.

 

 

 

 

 

임씨가 실종된 아들과 나눈 메시지(왼쪽). 기운 배 안에서 구명조끼 입은 사진을 보낸 것이 마지막이었다(오른쪽).

 


수혁이를 비롯한 학생 대다수는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여객선이 왼쪽으로 갑자기 기울어 하늘로 치솟은 오른쪽 객실에 머물던 학생보다는 바다와 가까이 있던 왼쪽 객실에 있던 학생들이 빠져나오기가 좀 더 쉬웠다. 수혁이가 속한 반은 오른쪽 객실에 있었다. 31명 가운데 2명만 구조되었다.

왼쪽 선실에 있던 생존자 한 아무개씨(38)는 아비규환 현장에서 승무원 고 박지영씨와 조 아무개군(8) 어머니를 잊을 수 없다. 30~40명이 3층 로비에 있었는데, 구명조끼가 부족했다. 여학생과 여자 성인을 중심으로 구명조끼를 입혔고 한씨 등 남자들은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다. 승무원 박지영씨도 구명조끼를 양보했다. 지영씨 손에는 끝까지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한씨는 “그 여자 승무원이 ‘상황보고! 상황보고! 말해달라’는 무전을 여러 번 쳤다. 침몰될 때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선장 등이 머물고 있다고 여긴 조타실에 지침을 달라고 무전을 친 것인데, 선장은 이미 탈출해 구조선에 있었다. 지침을 받지 못한 박씨는 독자적으로 판단해 물에 뛰어들라고 지시했다.

생존자 한씨가 기억하는 또 다른 이는 조 아무개군 엄마다. 그녀는 배가 기울고 침몰하는 순간까지 구명조끼를 입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다. 한씨는 ‘저걸 왜 입지 않고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 엄마는 조 아무개군이 잘 있는지 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살아 있다는 소리를 듣자, 그제야 어머니는 구명조끼를 입었다. 한씨는 “아들 주려고 그 위험한 순간에 구명조끼를 안 입고 있었다. 그분이 못 나왔다”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제주도 여행을 가던 조군은 구조되었지만 부모와 형은 실종자로 분류되었다.

같은 시각 수혁군 부모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안산 단원고로 향했다. 양복 차림, 출근 복장 그대로였다. 오전 11시, 버스를 타고 진도로 출발했다. 버스 안에서도 임씨는 전원 구조되었다는 정부와 언론 보도만 믿었다. 놀란 아들을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임씨는 오전 11시30분 카카오스토리에 아들이 갑판에서 친구와 찍어 보낸 사진을 올렸다. ‘울! 아들, 인천항에서 세월호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도중 짙은 안개 때문에 암초에 부딪혀 침몰사고!! 전원 구조됐다는데 아직 걱정이네요^^(현재 이 글에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등의 댓글이 90여 개 달려 있다).’ 임씨는 오후 4시30분 368명이 아니라 164명만 구조되었다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발표를 접했다. 속이 타들어갔다.

 

 

 

ⓒ시사IN 이명익4월17일 저녁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메시지가 적힌 종이를 든 참석자들이 실종자들의 생환을 기원하고 있다.


4월16일 오후 5시30분 임씨는 진도 실내체육관에 도착해 입구에 마련된 구조자 명단부터 살폈다. “없어 없어”를 외치던 주변 학부모들은 실신했다. 임씨는 “오전부터 진도에 도착한 저녁까지 구조가 제대로 안 된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날 저녁까지도 진도 실내체육관에서는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체육관 제일 앞자리에 꾸려진 상황실이라고 해봐야 텔레비전 두 대가 전부였다. 구조 상황을 알려주는 안내판 하나 없었다. 임씨는 체육관에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사고 해역에서 가장 가까운 팽목항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사고 현장을 둘러봤다.

4월17일 새벽 2시 임씨는 사고 현장에서 다시 팽목항으로 돌아왔다. 팽목항을 떠나지 못했다. 체육관에 구호 물품이 많고 잠자리도 마련되었지만, 팽목항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임씨가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조그만 컵라면 한 개가 전부였다. 아침 8시, 하늘도 무심하게 비가 쏟아졌다. 임씨는 망부석이었다. 팽목항에서 바다를 쳐다보며 밤을 새웠다. 하염없이 기다렸다. 현장에서 나눠주는 우비만 겨우 챙겨 입었다. 양복 정장 바지 끝자락은 이미 비에 흠뻑 젖었다. 팽목항에 남아 있는 임씨를 비롯한 학부모들은 수색작업이 더디다고 불만이 컸다. 언론 보도에 대한 불신도 높았다.

이날부터 일부 시신이 인양되었다. 사망자가 확인될 때마다, 진도 실내체육관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해경 관계자가 “6번째 사망자 신원이 확인되었다”라며 이름을 부르자, 순간 비명이 터져나왔다. 인양된 시신은 해남과 목포 일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영안실에서 만난 김병규군(가명·17) 아버지는 취재진에게 먼저 다가와 ‘기자인가’라고 물었다. “병규 아빠인데 제발 우리 아들 좀 냉동고에서 빼내 따뜻한 곳으로 옮겨 심폐소생술 한 번만 해주세요. 한 번만. 그러면 가슴에 묻고 갈게요. 그것 꼭 좀 기사에 써주세요.” 아버지는 기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임씨를 비롯한 학부모들이 모여 있던 팽목항 현장도 상황실은 텐트 하나만 덜렁 놓여 있었다. 텐트 안 책임자는 해수부 소속 국장뿐이었다. 한 학부모는 “여기에 정부는 없다”라고 말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학부모들은 해수부 국장에게 빨리 구조에 나서달라고 항의했다. 해수부 국장은 “구조작업에 열심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임씨는 그 모든 상황을 지켜만 보았다. 가끔 스마트폰을 꺼내, 아들과의 카톡 내용을 다시 보았다. 카카오스토리에 접속해 사람들이 남긴 기원 메시지도 보았다.

4월17일 오후 2시 팽목항에 있던 학부모 가운데 한 명이 생존자 명단이라며 발표했다. 배 안에 있는 한 학생이 진도 실내체육관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낸 문자라며 60여 명 명단이 포함된 문자를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발표자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름이 불리면 한쪽에서 환호성이 터졌다(이 명단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60명 가운데 수혁이 이름은 없었다. 오후 4시쯤, 임씨는 팽목항 주변에서 수혁이의 같은 반 친구 아버지가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아버지와 생존자로 알려진 명단을 보면서 임씨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눴다. 시간이 멈췄으면, 그래서 훤한 대낮만 계속되기를 바랐지만 밤은 어제보다 빨리 왔다. 비가 많이 내린 탓이다. 임씨는 이날 밤도 팽목항에서 지새웠다.

 

 

 

 

 

ⓒ시사IN 조남진사고 해역을 찾았다가 팽목항으로 돌아온 실종자 가족들이 부둥켜안은 채 흐느끼고 있다.

 


4월17일 오후 4시20분 임씨는 여전히 팽목항에 있었다. 그저 바다만 바라보았다. 이날 오후 2시부터 박근혜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임씨는 팽목항에도 대통령이 올 줄 알고 진도 실내체육관으로 가지 않았다. 그보다 대통령이 온다고 해도 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깊었다. 같은 시각 박 대통령은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았다. 대통령을 만난 가족들은 가장 먼저 상황실을 설치해달라고 요구했다. 한 학부모가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들었다.

“대통령님, 대한민국의 주인이 누굽니까?” 박 대통령은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이죠”라고 답했다. 저녁 8시, 안산 단원고 운동장에는 수혁이의 선후배를 비롯해 학부모와 인근 학교 학생 5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촛불 대신 스마트폰 플래시를, 한손에는 ‘배고프지? 엄마랑 밥 먹자’라는 글귀가 적힌 종이를 들고 실종자들의 생환을 기원했다.

4월18일 대통령이 다녀간 뒤 진도 실내체육관에는 커다란 스크린 두 개가 생겼다. 하나에는 텔레비전 뉴스 속보가, 다른 하나에는 사고 현장을 찍은 영상이 비쳤다. 구조상황을 알려줄 해경 관계자도 상주했다. 팽목항에도 상황판이 생겼다. 하얀 칠판이었다. 이날 낮 12시께 바다에 떠 있던 세월호 뱃머리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겨우 2시간 눈 붙이고 바다만 바라보던 수혁이 아버지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사흘 내내 큰 소리 한번 안 냈던 그는 상황실로 뛰어들어가 외치고 또 외쳤다. “빨리 좀 구해달라. 빨리 좀.” 상황실을 나서며 그는 혼잣말로 “다 죽었구먼”이라며 절망했다. 그는 다시 망부석이 되어 바다만 바라보았다. 줄담배만 피웠다.

 

기자명 진도·목포·해남·안산/김은지·송지혜&mi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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