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9일 새정치비전위원회(비전위)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비전위는 야권 신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창당 과정에서 띄운 별도 기구다.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새정치의 내용을 채워넣는 임무를 맡았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비전위는 첫 번째 정치 개혁안으로 국회 비례대표 의석을 대폭 늘리자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유권자의 지지율 분포가 더 잘 반영되는 의석 분포를 만들면 지역기반 독과점 정당체제를 흔들 수 있고, 직능·계층·소수자를 대표하는 기능이 강화되리라고 보았다.

반향은 크지 않았다. 많은 언론이 이날 기자회견을 단신 처리했다. 외부 인사로 구성된 별도 기구의 제안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정치 현장에서 거듭 증명되어온 바 있다. 실제 집행권한을 가진 정치권이 별도 기구의 제안을 뭉개거나 물타기를 하는 것은 아주 쉽다.
 

ⓒ연합뉴스‘안철수식 새정치’의 내용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승자독식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비례 강화파’와 정치 혐오에 응답하기 위한 ‘정치 해체파’는 지난 2년간 새정치의 내용을 두고 내부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비례대표를 늘리자는 제안은 지역구 의석수를 줄이거나 국회의원 정원을 늘려야만 가능하다. 둘 다 험난하다. 전자는 지역구 의원의 반발이 거셀 것이고, 후자는 여론 저항을 뚫어내야 한다. 비전위의 제안 역시 그런 시험을 이겨내야만 기사 가치가 생기므로, 언론은 이 제안에 별달리 주목하지 않았다.

이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날의 기자회견은 어떤 이들에게는 ‘2년 동안의 패배 끝에 거둔 첫 승리’였다. 왜 그런지를 이해하려면, 대선 국면이던 2012년으로 시계를 되돌릴 필요가 있다.

2012년 대선 국면에 진입하면서부터 ‘안철수식 새정치’의 방향을 둘러싼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한편에는, 현 정치제도의 왜곡을 개선해서 권력 배분에 민의가 좀 더 정확히 반영되도록 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다수 소선거구제가 초래하는 승자독식 구조 때문에 정치에서 소외되는 민의가 발생하고, 이 소외된 유권자가 만들어낸 반격의 물결이 안철수 현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승자독식 구조를 개혁하는 것은 안철수 현상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대표적인 방향으로 비례대표제 강화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안철수 현상의 핵심에는 광범위한 정치 혐오가 있다고 보고 이 정치 혐오에 응답하기 위해 일련의 정치 해체 기획을 내놓는 흐름이 있었다. 이들은 정치권이 유권자에게 불신을 받고 있으므로 정치권이 먼저 나서서 자신의 권한을 내려놓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방안으로 안철수표 정치공약의 상징처럼 되었던 ‘국회의원 100석 축소’가 있었다.

두 노선 중 ‘비례 강화파’의 주력은 정치학자 그룹이었다. 이는 당대의 화두였던 복지국가와도 잘 어울렸다.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는 다양한 사회 세력의 의사를 반영하므로 사회적 타협에 의한 복지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논의가 활발했다. 몇몇 학자들은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의 단일화 경쟁 국면을 제도 개혁을 위한 최대의 기회로 파악했다. 문·안 캠프가 비례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치 혁신 경쟁을 벌이도록 한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사진공동취재단2012년 12월15일 안철수 전 대선 후보(왼쪽)와 문재인 후보(오른쪽)의 광화문 공동 유세 현장. 지난 대선에서 문·안 캠프 일각에는 비례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치 혁신 경쟁을 하자는 공감대가 있었다.

 


양쪽 캠프에 들어간 정치학자들은 두 캠프의 갈등 수위가 높아지는 동안에도 물밑 교류를 지속했다. 캠프는 다르지만 사실상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는 그룹이었다. 문재인 캠프에서 정치 개혁안을 담당했던 성공회대 정해구 교수는 “안철수 캠프에 정당 전공자가 부족하다고 해서 사람을 추천해준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거듭된 ‘정치 해체파’의 승리

10월22일, 문재인 후보가 먼저 정치 개혁안을 발표한다. 지역구 246석 대 비례대표 54석인 현재 의석 분포를, 지역구 200석 대 비례대표 100석으로 조정하자는 안이었다. 비례성 강화다. 안철수 캠프에 가 있는 학자들은 이를 지렛대로 더 나아간 비례성 강화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보았다. 지역구와 비례가 1대1로 양분되는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던져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하지만 학자들은 큰 혼란에 빠진다. 이튿날인 10월23일, 안철수 당시 대선 후보는 ‘국회의원 정원 100석 감축안’을 던졌다. 대중의 정치 혐오를 자극하는 전형적인 ‘정치 해체파’ 기획이었다. 새정치의 노선은 두 캠프의 비례 강화파들이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국회의원 정원 100석 감축안은 안철수 후보에게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오피니언 리더층이 안 후보를 포퓰리스트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진보 정당, 정치학계, 시민사회 등이 전방위로 비판을 쏟아냈다. 안 후보가 하락세로 돌아선 결정적인 시점으로도 꼽힌다(〈시사IN〉 제268호 커버스토리 ‘엘리티즘+포퓰리즘=정당정치 혐오’ 참조).

 

 

 

 

ⓒ연합뉴스3월19일 백승헌 비전위 위원장(가운데)이 비례대표 확대안을 발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몇몇 인사들이 ‘핵심’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안 후보 본인이 정치 해체파에 가까운 성향을 수시로 노출했다. 안 후보는 “정당보다는 개인을 보고 뽑는 것이 맞다” “무소속 대통령이 낫다” 등 정당정치의 근간과 배치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해서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최측근인 ‘시골의사’ 박경철씨도 “안철수 교수가 서울시장직은 정치가 아니라 행정의 영역이라고 보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동안 ‘안철수의 새정치’는 정치 해체파 노선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국회 입성 이후 삼고초려해서 영입했던 최장집 명예교수의 이탈 역시 안철수 팀 특유의 정치 해체 노선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다(〈시사IN〉 제310호 커버스토리 “중도는 아니다, 야권과 경쟁하라” 참조). 비례 강화파 중 몇몇은 안 의원 곁을 떠났고, 몇몇은 외부에서 언론 기고 등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며 기회를 기다렸다.

올해 초 안 의원이 본격 창당 작업에 들어가면서 비례 강화파는 두 번째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승자독식 선거제도는 양당제를,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는 다당제를 낳는 경향이 있다. 안 의원이 신당을 만들면 다당제 구도로의 정계개편을 노려야만 하므로, 안 의원으로서도 비례 강화파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생긴다. 때마침 윤여준 전 장관 같은 비례 강화파와 ‘코드’가 맞는 인사들도 신당에 참여했다. 새정치의 핵심 슬로건으로 비례성 강화를 내걸고, 이를 고리로 민주당과 연대를 한다는 구상이 논의되었다. 지방선거가 발등의 불이었던 민주당으로서는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안 의원 측 핵심 관계자는 “비례대표 강화론을 고리로 걸자고 생각하는 조언자가 안 의원과 꽤 깊숙이 얘기를 나누고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쪽 핵심 관계자도 “(통합 논의 과정에서) 비례대표제를 주제로 물밑 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기초단위 무공천’을 비판하는 청년 시민단체 대표들.

 


그러나 비례 강화파의 반격은 또다시 진압되었다.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새정치연합)은 연대가 아니라 통합을 결정했다. 승자독식 구조에서 이득을 얻는 양당제로의 회귀는 비례성 강화의 압력을 떨어뜨린다. 더욱이 통합 명분 또한 빼앗겼다. 두 세력은 통합 명분으로 내걸 새정치의 핵심 브랜드를 비례성 강화가 아니라 ‘지방선거 기초단위 무공천’으로 정했다.

새정치 노선투쟁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기초단위 무공천은 전형적인 정치 해체 기획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기초단위 무공천은 정당의 모세혈관이 되는 기초단위 조직 붕괴를 초래한다. 정치의 기능장애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의원 100석 축소’나 다를 바가 없다는 지적은 정치학계를 중심으로 거의 합의된 목소리에 가깝다.

안철수 의원은 기초단위 무공천이 정치의 기능저하를 불러온다는 비판에 제대로 답한 적이 없다. 안 의원이 내세우는 최대의 명분은 “대선 때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 의원은 대선 당시 내놓았던 ‘의원 100석 축소’와 ‘법정 선거비의 절반만 사용’ 같은 (역시 정치의 기능장애에 기여하는) 다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안 의원으로서도 기초단위 무공천을 새정치의 최대 브랜드로 삼는 것은 어려웠다. 새정치의 내용을 채울 별도 테이블이 꾸려졌는데, 비례 강화파는 이 테이블을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보았다. 비례 강화파는 비전위를 외부 인사로 구성된 완전 독립기구로 삼을 것, 민주당과 새정치연합 측 정치권 인사를 배제할 것, 김한길·안철수 두 사람이 비전위에 힘을 실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비전위의 제안을 구속력 있게 만들려는 시도였다.

이 요구 대부분이 받아들여졌다. 안 의원은 절박했고, 민주당은 판을 깨지 않도록 무슨 요구든 들어줄 태세였기 때문이다. 확고한 비례 강화파인 최태욱 교수(한림대)가 간사로 선임됐다. 위원장을 맡은 백승헌 변호사 역시 비례성 강화의 취지에 공감하는 인사로 알려져 있다. 3월19일, 비전위는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국회의원 비례성 강화 제안을 내놓는다. 새정치 노선투쟁에서 늘 수면 아래에만 잠복해 있던 비례 강화파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공식 경로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이것은 비례 강화파의 승리일까. 그렇게 보기보다는 2년이 걸려서야 겨우 무대에 올라올 자격을 얻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해 보인다. 무대에는 등장했지만 여전히 크게 약세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았다. 비례 강화파로서는 넘어야 할 산이 아주 많고, 하나하나가 높다.

비례성 강화는 민의를 비교적 정확히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함량 미달의 의원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여론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유권자의 손이 아니라 정당 보스의 손으로 국회의원을 뽑는다는 불만도 널리 퍼져 있다. 해결 방법은 있다. 비례후보 명부를 개방형으로 만들어 유권자가 직접 비례대표 후보에 투표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 지금처럼 정당이 정한 순서대로 국회에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후보 명부에서 표를 많이 얻은 순서대로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구체적인 논의를 할 분위기조차 무르익지 않았다.

“안철수, 좋은 이야기면 그냥 따라가는 게 문제”

현 상태에서 새누리당이 동의해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비례성 강화는 거의 필연적으로 지역구 의석 축소에 따른 격렬한 반발을 수반하는데, 현재의 승자독식 구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새누리당이 굳이 그런 도박을 할 이유가 없다. 그 때문에 비례 강화파의 현실적인 목표 역시 비례성 강화를 당장 입법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제1 야당의 당론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비례 강화파에게는 사상 최대의 진전인 데다가, 여론 구도가 잘만 잡히면 2016년 총선 국면에서 여당을 압박할 수 있다는 기대도 하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겉으로는 “비전위에서 어떤 혁신안이 나오든 받는다”라는 태도이지만, 실제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비전위를 이런저런 비공식 경로로 만류하려는 시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지도부 핵심 인사는 사석에서 ‘비전위 조기종료론’을 거론하기도 했다. 통제가 만만찮은 외부 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이제는 부담스러운 기색이다. 반면 민주당 안에는 손학규·정동영 상임고문 등 비례 강화파의 우군도 제법 포진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수는 안철수 의원의 태도다. 안 의원은 지난 대선 국면 이후로 새정치 노선 쟁탈전에서 거의 언제나 정치 해체파의 손을 들어준 이력이 있다. 당장 비전위가 비례성 강화 기자회견을 한 다음 날인 3월20일 묘한 소식이 언론을 탔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다음 총선에서 지역구 공천을 주지 않는 방안을 새정치연합이 검토한다는 것이었다. 새정치연합 관계자는 “내부에서는 상당 수준 합의가 이뤄진 사안이다. 비례대표가 지역구 표밭갈이를 하느라 의정활동을 소홀히 하는 것이 제도의 취지와 맞지 않다”라고 말했다. 비전위의 비례성 강화 제안과 충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결국 비례대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자는 취지이므로 일맥상통한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실제로는 그 반대다. 비전위 안과 새정치연합의 안은 비례 강화파와 정치 해체파의 충돌이라는 구도로 해석할 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비례대표 의원의 지역구 공천 봉쇄 조항은 비례대표라는 경로로 정치에 입문해 성장하는 고리를 끊는, 전형적인 정치 해체론 기획이다.

비례 강화파의 핵심 인사는 비례대표의 지역구 공천 봉쇄안 검토 소식을 듣자마자 “허허, 또 그러네 그 사람들”이라며 허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안철수 의원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좋은 이야기, 이를테면 기득권을 버리자거나 시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자거나, 이렇게 선의로 포장된 이야기에 잘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실 정치학의 관점으로 보면, 기득권 타파니 시민의 직접 참여니 하는 말로 포장한 아이디어가 결국 정치의 기능장애를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유권자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정치의 기능을 강화해야 우리 사회의 진짜 기득권을 통제할 수 있는데, 거꾸로 가는 거다.”

왜 그럴까. “안 의원이 정치의 기능 강화와 정치 해체라는 정반대 계통의 기획을 구분하지 않는 것 같다. 선하고 좋은 방향이다 싶으면 받아들여 버린다고나 할까. 그래서 어떨 때 보면 안 의원 쪽에서 나오는 말이나 노선이 자기들끼리 충돌하고 방향이 다르고 그런다.”

새정치 노선투쟁의 주도권이 여전히 정치 해체파에 있다는 징후는 거듭 확인되고 있다. 비례 강화파가 수면 위로 처음 올라온 3월19일의 기자회견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장면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으로 기억될지, 정치사에 수없이 많았던 그렇고 그런 외부 제안 중 하나로 잊혀갈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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