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준을 만났다. 과거 새누리당 계열 세력에 오랫동안 몸담았고, 2012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그가 올 1월에는 안철수 의원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여 새정치추진위원회(새정추) 의장을 맡았다.

마침 책(〈윤여준의 진심〉)이 나왔다. 개인사, 한국 민주주의 진단, 박근혜 정부에 주는 고언 등을 주제로 10여 차례의 강연록을 정리하고, 새정추 합류의 변을 밝힌 권두 인터뷰도 붙였다. 2월7일 아침 7시30분부터 100분 동안 윤 의장과 마주앉았다.

ⓒ시사IN 조남진윤여준 의장(위)은 “박원순 시장이 민주당에 들어가면서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가 전쟁을 겪은 세대의 트라우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책의 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전쟁으로 극대화됐지만 넓게 보면 현대사에 대한 트라우마다. 광복 이후부터 굉장히 심한 충돌이 있었다. 전쟁 이후에도 남북한이 정치·경제·군사·외교적으로 대결했고. 무장간첩 내려오고, 테러 터지고… 쌓이고 쌓인 트라우마다. 선거를 치르려면 그 현실을 인정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옳다 그르다 가치판단만 하면 안 된다. 민주당이 종북 프레임에 번번이 말리는 건 전략의 문제일까, 태생적 문제일까? 큰 선거를 치르려면, 이를테면 종북 공세를 어떻게 받아칠 거냐를 놓고 1년 전에 다 준비하는 게 정상이다. 더 큰 이슈를 던지거나, 다른 이슈로 바꾸거나, 묵살해서 소멸시키거나, 그러면 또 상대가 어떻게 나올 테니 그땐 이렇게 하는 식으로 몇 수를 짜고 들어간다. 그런데 대선 때 보니까 민주당이 준비가 전혀 없더라. 책을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유지의 위기를 예상했다. 보수 세력과 재벌이 국민의 경제민주화 욕구를 누르려고 하지 말라는 거다. 그게 누른다고 눌러지지도 않고. 더 잘못해서 눌린 분노가 폭발하는 상황이 오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지속 가능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다.
윤여준 의장이 최근에 펴낸 책. 10여 차례의 강연록을 정리하고, 새정추 합류의 변을 밝힌 권두 인터뷰를 실었다.
보수 집안에서 자랐고, 뿌리가 보수라고 썼다.
헌법에 나온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말은 사회민주주의까지 포괄할 수 있다. 의회주의 틀 안에서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사민주의는 우리 헌법이 품을 수 있다. 보수의 관점에서 체제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려면 변화를 먼저 수용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보수에게 진보가 왜 소중하냐 하면, 끊임없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보수가 새로워진다. 서로 건강성을 만들어주는 상호보완적 경쟁. 그런데 우리는 극한투쟁을 한다. 이건 진보·보수 가치의 싸움이 아니라, 권력투쟁에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거다. 자기 세력을 결속하기 손쉽고 상대를 때리기도 좋으니까.

여야의 극한투쟁 구도에서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가 성립했다는 진단인데, 이를 깨려면 제3세력의 외부 충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안철수 현상 이전부터 품고 있었다. 2011년에 안철수 교수와 시골의사 박경철 씨가 전국 대학을 찾아다니며 청춘 콘서트를 했는데, 가는 데마다 몇 시간 전부터 대학생이 줄을 섰다. 충격을 받아서 현장에 오는 대학생을 여럿 붙들고 왜 안철수에게 열광하는지 물어봤다. 다들 하는 말이,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어서 큰돈을 벌 수 있었는데도 이걸 사회에 몇 년씩 무료 공급한 건 사회에 공헌한 거 아니냐, 거기에 감동받았다고 하더라. 그런 걸 보고 공적 헌신성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의 공공성이 파탄 났다고 사람들이 의식을 못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갈증이 있는 거다. ‘새정치’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공공성을 회복하는 정치’와 ‘생활 정치’를 답으로 내놓았다. 그렇다. 정치라는 게 민생을 떠나서 무슨 의미가 있고 왜 존재해야 할까? 정치의 본질인 민생으로 돌아가자는 게 생활 정치다. 공공성은 국가라는 거대한 정치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핵심 가치다. 공공성 없이는 국가를 만들 수도 없고 유지도 안 된다.

ⓒ연합뉴스1월27일 ‘새정치추진위원회 청년위원회 해오름식’에 참석한 안철수 의원(왼쪽)과 윤여준 새정치추진위원회 의장.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과, 안철수 현상을 이용해 기존 양당 구도에 충격을 주고픈 사람이 공존한다. 둘은 좀 다른 길 아닌가? 그래서 안 의원이 몇 차례 다짐한 게 있다. 정확한 표현으로 “저는 제가 꼭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은 버렸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대선 당시 제가 문재인 후보에게도 말했는데, 말의 뜻을 못 알아듣더군요”라고 하더라. 안 의원 자신도 목표는 새정치를 구현하는 것이고, 대통령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거다.

대선 때에는 유력 후보가 셋이 있었는데, 그중 문재인 후보 지지를 택했다. 그때도 민주적 가치와 공공성이라는 잣대로 고른 건가? 그랬다. 당시 박근혜 후보의 경우 권위주의 리더십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계속 얘기했다. 문재인 후보는 전혀 모르던 분이었는데 만나보니 사람이 개방적이고 겸손하더라. 그분이 날더러 국민통합위원장을 맡아주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이후를 준비할 별도 기구도 같이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몇 번을 사양하다가 맡았는데, 무슨 사정인지 나한테 얘기했던 것들이 속속 무산됐다. 웬일인가 들어봤더니 당 안팎의 이른바 친노 세력이 반발해서 문 의원이 결국 포기했다더라. 그래서 어떻게 보면 편하게 잘 있다 왔다. 대선 때는 왜 안철수가 아니라 문재인이었나? 둘 중 고른 것이 아니라 한쪽은 애초에 제외했다. 안 후보의 9월 출마선언문을 보고 얼마 못 버틴다고 봤다. 기존 정당이 확장성이 없다고는 해도 철근콘크리트처럼 강고한 기득권이 있어서, 그걸 깨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국민 가슴에 고여 있는 불만과 분노에 불을 댕기지 못하면 그거 못 부순다. 출마선언문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밋밋해서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안철수 신당에 대한 기대는 낮지 않은데 정작 수도권에서 가상 대결을 해보면 15%선에서 정체되고 있다. 그건 후보에 달렸다. 폭발력이 있는 후보를 찾아야 한다. 사람은 있는데 설득이 어렵다. 3자 구도에서 웬만한 폭발력 없이는 이기기 어려운 게 맞다. 하지만 안철수 개인에 대한 지지가 많이 살아 있으니 좋은 인물을 영입해서 안 의원의 역량을 전력투입하면 해볼 만하다.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의원은, 안철수 신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분 처지에서는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안 교수가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할 때는 무소속 시민후보라는 전제로 한 것이다. 나중에 박 시장이 민주당에 들어가면서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단일화는 분명히 없다고 봐도 되나? 단일화는 없다는 의지가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일 것 같나? 안철수 본인이다. 야권 연대 프레임을 엎어야 한다. ‘새정치 대 낡은 정치’ 구도에서는 민주당도 낡은 정치다. 우리가 왜 야권인가.

단일화가 딜레마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 그때는 기자가 사석에서 가정법으로 질문했다. “나중에 다수 국민이 연대하라고 하면 어쩔 것이냐” 이렇게. 그러니 민주주의 정당이 다수 국민 의사를 무시한다고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독자완주 원칙을 버리기도 쉽지 않고. 공식 회견이면 그렇게 말 안 했겠지(웃음). 안철수 의원의 서울시장 직접 출마론도 있었다. 내가 건의했다고 보도되던데, 의장이 추진위원장한테 ‘건의’하는 건 안 맞다(웃음). 공적으로 검토한 바 없다. 언론·정치인·학계 등등 주변의 많은 사람이 안철수 서울시장이 가장 좋은 카드라고 말해줘서, 나뿐만 아니라 안 의원도 여기저기서 듣기는 했다.

예비 후보군 사이에서 수도권 3자 대결은 불가능하다는 정서가 있다. 단일화를 원천 봉쇄하면 인재 영입도 빡빡해지지 않나? 쉽지는 않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안철수) 본인이 나서는 게 최선의 카드라고 우리한테 얘기해주는 거다. 우리도 이론적으로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다. 노원병 보궐선거 당선한 지 1년 만에 던지고 나간다? 본인 성격도 그렇지 않을 거고. 대선 행보와 맞지 않아서라는 평도 나온다. 본인이 그걸 앞세우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런 이유는 아닐 거다.

새정치가 말 그대로 새로운 전선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양당의 가운데쯤 되는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건 안 되는 길이다. 그건 아니고, 지방선거는 원래 새정치위원회의 목표라기보다는 현실 일정이 닥치니까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방선거는 우리가 어느 정도 세력기반만 잡을 수 있으면 성공이라고 본다. 진짜 목표는 총선과 대선이다. 지방선거 끝나고 나면 총선까지 2년 정도 시간이 있다. 그 2년 사이에 진짜 게임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득권 구조를 밀어내야 한다. 역량의 문제다. 2년 동안 정당 활동 잘해서 신뢰를 쌓아가면 총선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다.

총선·대선이 목표라면, 신당은 상황 봐서 연대하는 당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길을 가는 당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야 하나? 그래야 한다. 합류하기 훨씬 전에 누가 조언을 구하기에 이런 얘길 해준 적이 있다. ‘지방선거는 너무 코앞이다. 의미 있는 결과는 처음부터 포기해라. 무엇으로 승부하느냐가 중요하지, 많은 사람을 당선시키는 건 무리다. 그 선거에서 깨지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 다만 정말로 새정치다운 모습으로 깨져라. 그러면 국민이 인정해주고, 총선과 대선에서 기회를 반드시 준다.’ 단순다수대표 소선거구제가 제3세력의 등장을 막는, 양당제에 유리한 제도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옳다. 대선 결선투표제 도입이라든지, 단순다수대표 소선거구제 개혁의 필요성은 국민이 충분히 인정했다고 본다. 국민에게 호소하고 설득하면, 국민적인 압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기초공천제 폐지 문제는 대선 공약을 어긴다는 점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오히려 정치의 기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당정치의 관점에서만 보면 기초공천 폐지는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당정치가 정당정치인가? 헌법이 명한 기본 역할을 하는 정당이 있나? 진성당원이 있기는 한가? 정당정치는 제대로 못하면서 폐해만 엄청 만들어내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지방선거 무용론이 틀림없이 나온다. 그건 막아야지. 지방정치가 민주주의의 뿌리인데. 내 의견은 한시적으로 폐지해보자는 거다. 안 의원은 대선 후보 시절에 반값 선거운동, 국회의원 100석 축소 등의 안을 내놓았다. 정치를 ‘고비용’ 구조로 보는 CEO 마인드가 느껴진다. 그때 나도 비판했다. 정치를 산출과 투입으로 본다면, 산출을 늘릴 생각을 해야지 투입을 줄일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특유의 CEO 마인드로 민주주의 정치 과정을 낭비라 보고 생략하고 우회했다. 그 결과 끊임없는 갈등과 반대에 부딪혀서 사회적 비용만 폭증하고 효율도 떨어졌다. 크게 보면 정치를 감축하는 게 더 고비용이다. 하지만 최근의 기초공천 폐지론에서도 그런 마인드를 계속 읽는 관찰자가 적지 않다. 3년 전 ‘청춘 콘서트’ 시절에 안 교수랑 얘기하다 보면 CEO 마인드가 팍팍 보였다. 오랫동안 길러진 거니까. 그러나 본인이 정치에 들어와서는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창당하려면 돈 문제가 만만치 않을 텐데. 안 의원의 재산이 창당 비용을 내고도 남겠지만, 그렇게 사재 출연에만 의존하는 창당은 반대다. 1인 보스 정당이랑 다를 게 뭔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내는 정도는 되겠지. 능력껏, 법의 테두리 내에서 모금하고 국고보조 받고 하면 된다. 2011년 11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서울시장 선거에서 안 의원이 포기한 것은 가족의 반대 때문이고, 박원순 시장에게 양보하기 전부터 포기가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고 말했던 바 있다. 뭐,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냥 안 나간다고 하면 그만인데, 그러지 않고 박 시장에 완전히 힘을 실어줬다. 100% 양보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양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5% 지지율의 박원순 후보를 시장으로 만든 사실은 불변이지 않나. 개인적으로 많은 비난을 감수했다. 안 의원 측에 다시 합류해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 한국 정치를 구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공공성을 살리고 민생 중심의 정치를 하기가 어렵다는 거 다들 알지 않나. 거대 양당이 다수 국민을 대변하지 못한다. 지지율은 낮고 투표율은 떨어지고. 이대로는 민주주의가 위기 국면에 들어간다. 양당이 대변하지 못하는 다수를 대변하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체제가 유지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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