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두 사람씩 짝을 이뤄 10분간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주세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남녀 10여 명이 옆 사람과 짝을 이루기 시작한다. 처음 만난 서먹함은 잠시. 자기가 누군지, 하는 일은 뭔지 설명하는 동안 대화는 점점 열기를 띠어간다. 그렇게 10분이 흐르고, 좌중을 상대로 발표에 나선 참석자들은 자기 파트너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을 진지하게 또는 유머러스하게 묘사한다. 그사이 찾아낸 공통점도 제각각이다. “우린 둘 다 물류를 다루는 일을 해요.” “우린 한때 글을 썼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런가 하면 별다른 공통점을 찾지 못한 남성 두 명은 “우린 키에 숫자 7과 8이 들어가요. 187㎝, 178㎝예요”라며 좌중을 웃겼다.

ⓒ시사IN 조남진스페이스 노아는 지난해 12월 북창동 유흥가에 문을 열었다. 룸살롱이었던 건물을 개조했다.

이들은 서울시청 인근 북창동에 위치한 ‘스페이스 노아’ (www.spacenoah.net)입주자들이다. 스페이스 노아는 요즘 새롭게 생겨나는 이른바 코워킹(coworking) 공간 중 하나다. 코워킹은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끼리 사무실을 공유하는 것을 일컫는다. 코워킹 공간 입주자끼리는 서로를 ‘코워커’라 부른다. 과거 코워커는 주로 같은 직장을 다니는 동료를 의미했다. 그런데 공간을 매개로 새로운 동료 관계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스페이스 노아의 경우 매주 목요일 코워커가 한자리에 모여 낯을 익히고 각자 하는 일을 공유하는 ‘네트워크 파티’를 갖는다. 앞서의 자기소개는 파티를 여는 첫 순서였다.

그전에도 모르는 사람끼리 사무실을 공유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사무실 같이 쓸 사람을 구하는 사이트가 널려 있다. 이런 데와 코워킹 공간은 어떻게 다를까. 일단은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르다고 스페이스 노아 정수현 대표(30)는 말한다. 기존 공유 사무실은 파티션으로 구획된 폐쇄적인 영역에서 각자 자기 업무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복사기 같은 사무용 집기와 전화 받는 비서 정도를 공유한다. 비용 절감 등 기능적인 목적이 사무실을 함께 쓰는 주된 이유인 셈이다.

ⓒ시사IN 윤무영 스페이스 노아 사무실은 파티션이 없는 개방적 공간이다.

물론 코워킹 공간 이용자에게도 비용 절감은 중요하다. 올해 초 창업을 결심하고 강남의 소호 사무실을 보러 다녔다는 강상모씨(34·호크마컨설팅 대표)는 “8명이 쓰는 사무실의 임차료 최저선이 월 60만원이었다. 가격도 비싸고 독서실 같은 분위기가 갑갑해 망설이던 차에 스페이스 노아를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스페이스 노아의 경우 오전 9시~오후 6시 사무실을 이용하는 데 드는 비용은 월 10만원이다(야간까지 이용 시는 18만원). 강남에 있는 다른 코워킹 공간도 월 이용료가 대부분 20만원 미만이다. 가난한 프리랜서나 창업 희망자, 1인 기업에는 복음이 따로 없다.

강좌·세미나 등으로 외부와 교류

스페이스 노아는 특유의 입지로 인해 월 이용료를 더 낮출 수 있었다. 유흥가로 유명한 북창동 일대에서 쇠락한 룸살롱 건물을 빌린 덕분에 임차료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어두운 그늘에 이런 공간이 생겨나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라고 정 대표는 말했다.

ⓒ시사IN 윤무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코워킹 공간이 관계를 맺는 매개체라는 점이다. 이들 공간 대부분은 칸막이가 없다. 어떤 곳은 넓은 탁자를 몇 개 놓고 아무나 그곳에 둘러앉아 일을 할 수 있게 해놓았다. 필요하면 옆 사람과 조곤조곤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구조다. 이런 열린 구조를 택함으로써 얻게 되는 첫 번째 이득은 혼자 일하는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업 이후 재택근무도 해보고 카페에서도 일해봤다는 김정관씨(리얼씨리얼 대표)는 “카페나 집에서는 아무래도 자기 안에 갇히기 쉬운데 이곳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활력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사람들끼리 부딪치면서 ‘생각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코워킹 공간의 또 다른 강점이다. 얼마 전 마리사 메이어가 야후의 새 CEO로 취임하면서 전통적인 형태였던 야후의 사무실 공간을 협업이 가능한 구글식으로 바꿔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당시 메이어는 “좋은 결정은 복도나 식당에서의 즉흥적 만남과 토론에서 출발하곤 한다”라고 말했다. 코워킹 공간은 어찌 보면 회사 구성원이 아닌 독립된 개인 사업자끼리 이런 소통과 협업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초유의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시사IN 윤무영입주자들은 매주 목요일 ‘네트워크 파티’를 갖는다(서 있는 이가 정수현 대표).

강상모씨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어제 상상하면 오늘 기획하고 내일 실행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독려하고 의견을 보태는 가운데 일의 진행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8월 초 프리랜서 작가인 김현정씨가 밥을 먹다 말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코워커들이 ‘기왕이면 서울시청 인근 직장인을 상대로 점심시간에 수업을 해봐라’ ‘그리기 수업도 함께 해봐라’ 같은 아이디어를 보탰고, 이튿날 ‘시청역의 점심시간’이라는 글쓰기·그림 강좌 프로그램이 완성됐다. 그림 수업은 스페이스 노아에 입주해 있던 류재훈씨가 맡았다. 개강은 8월29일. 아이디어 발제에서 실행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은 셈이다. 덕분에 강좌 홍보지 4000장을 배포하는 일을 거들게 됐다는 강상모씨는 “말을 꺼냈다 코를 꿴 측면이 있지만 실은 이런 시도가 굉장히 즐겁다. 내 사업을 구상하면서도 ‘부드러운 푸시(push)’를 받게 된다”라고 말했다.

의견을 나누던 와중에 본래 하려던 사업 아이템을 수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서로 눈이 맞아 창업을 함께하는 이도 있다. 의류 업사이클링(가치를 높이는 재활용) 업체인 젠니클로젯 디자인이 대표적이다. 스페이스 노아에서 만난 코워커끼리 팀을 결성해 독립했다.

ⓒ시사IN 윤무영프리랜서나 예비 창업자, 1인기업 사장 등이 주요 구성원이다.
교류는 내부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코워킹 공간은 강좌·세미나 등에 장소를 빌려주는 식으로 외부와의 접촉면 또한 넓히고 있다. 스페이스 노아 같은 경우 아예 건물 3층은 코워킹 사무실 공간, 4층은 카페형 대관 공간으로 나눠놓았다. 지난해 12월 개관한 이래 이 공간을 빌려준 횟수만 160여 차례다. 월 1000명가량이 스페이스 노아를 드나들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야 공간이 알려지고, 이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콘텐츠 또한 알려진다”라는 정수현 대표는 매달 ‘오픈 살롱’이라는 행사도 연다고 말했다. 외부 사람을 초청해 코워커들이 하는 일을 알리고 전시·시연도 하는 자리다. 여기에는 코워킹에 관심을 가진 사람 외에 벤처 투자자들도 참석하곤 한다.

한국은 걸음마 단계지만 이미 전 세계의 코워킹 공간은 130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2012년 기준). 불과 2~3년 사이 급속한 확산 추세를 보이는 것이다. 코워킹 전문 온라인 매체인 ‘데스크맥(Deskmag)’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코워킹 공간에서 일한 뒤 △소셜 그룹이 넓어졌고(86%) △비즈니스 네트워크가 확대됐으며(80%) △생산성이 향상됐고(74%) △창의성이 증진됐다(71%)고 답했다.

이런 이유로 이미 직장이 있는데도 코워킹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다. 공간이 주는 활력이 이들을 매료시키는 것이다. 서울 도봉동에 사무실이 있다는 박지호 갈등전환센터 팀장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트렌드를 접할 수 있어 스페이스 노아를 종종 찾는다”라고 말했다. 퇴근 후 거의 날마다 스페이스 노아에 들른다는 대기업 4년차 사원 이 아무개씨는 이곳이 놀이터이자 사찰 같은 힐링 장소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코워커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지루한 회사 업무로 누적된 때를 씻고 다시 하루를 시작할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대학생 후배들과 함께할 멘토링 겸 액션 프로그램을 구상하는 중이다.

ⓒ시사IN 조남진입주자들의 일을 외부에 알리는 ‘오픈 살롱’. 평소에는 블로그와 SNS로 홍보 활동이 이루어진다.

“공간의 가치를 최대로 끌어올리고 싶다”라는 정수현 대표는 그런 의미에서 전국적으로 ‘N개의 코워킹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공간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새로운 소통과 협업의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학원·종교 시설처럼 낮에 노는 공간을 제공하면 이를 코워킹 공간으로 리모델링하는 컨설팅을 조만간 시작할 계획이라는 정씨는 “이런 공간이 100개만 만들어져도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들이 뭔가를 도모할 수 있고, 〈설국열차〉처럼 ‘열차 밖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기대했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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