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어른을 지워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자 운동권 내부의 이름 높은 명망가들이 침몰하는 배에서 탈주하듯 말과 행동을 바꾸는 모습을 보며, 그 뒤를 이어 전직 학생운동권 인사들이 거물 정치인의 집에서 손님들 신발 정리하는 모습이 간간이 보도되던 시절의 일이었다. 살면서 너무 자주 듣다 보니 누가 처음 그런 말을 했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게 된 말들이 있다. 하나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것이고, 나이 들어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는 것이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서른 살 넘은 사람을 믿지 마라. 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을 읽다가 문득 일본에서도, 아니 젊은 한때를 거쳐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한 번씩은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혼자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우리가 스무 살이던 시절에는 분명 자신이 서른을 넘으면 지금의 어른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른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세상은 확실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의식의 수준이 높고, 이상에 불타는 우리가 어른이 되니 세상이 나빠질 리 없겠지. 나쁜 것은 지금 저기 있는 어른이다.”

새로운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느새 내 나이도 불혹(不惑)을 넘겨 스스로도 하는 말마다 모두 거짓처럼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는 큰 어른을 많이 여의었다. 김진균 교수,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리영희 선생 등 한때 우리 사회를 밝혀주었던 분들이 이제는 떠나고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프레시안〈/font〉〈/div〉김세균 교수(위)는 마지막 학부 강의를 책으로 엮었다.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가 퇴임 전 그의 교우들(홍세화·손호철·강내희·심광현·조희연·우희종·이도흠·하승수)과 함께 행한 마지막 학부 강의를 담은 책 〈사상이 필요하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정치적 기본기〉를 읽은 뒤 나는 감히 이제 떠나버린 어른들을 떠올렸다. 사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그간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 고민해왔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내용이다. 8명의 공동 저자가 여러 지면과 현장을 통해 수없이 이야기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부제가 말해주듯 ‘다른 세상을 꿈꾸는 정치적 기본기’이자, ‘낡은 것들이 더 이상 유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들이 새것에 의해 아직 대체되지 못한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고 추동해야 할 진보의 현실, 청년의 오늘이 너무나 처참하다. 진보는 갈 길을 잃었고, 청년들은 노동자로 ‘수탈당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잉여’로 추락할지 몰라 불안한, 오늘의 떠도는 개인이 되었다. 청년 세대는 이제 어떤 호명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아니,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되고, 이용되고, 폐기되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못마땅하게 여긴다.

김세균 선생은 희망버스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정년퇴임 이후 서울대에서 명예교수 직위를 받기까지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것이 고통받는 현장을 떠나지 않고, 이론과 실천을 함께해온 백발의 대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접이다. 이런 말 하는 것이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인 줄 알지만, 한때 마음에 어른이 없던 나도 이제는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먼저 되돌아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청년이 우리의 미래라면, 어른은 청년의 미래다. “나쁜 것은 지금 저기 있는 어른”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지금 우리에겐 “사상이 필요하다”.

기자명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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