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가연합(CIS)과 동유럽. 한국인들에게는 한때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공포의 땅이었으나,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는 전쟁과 학살, 마피아, 경제적 혼란으로 표상되는 나라들이다. 작가 유재현이 지난 6개월여 동안 CIS와 동유럽의 깊숙한 내면을 탐사하고 돌아왔다. 〈시사IN〉은 지금도 방진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야 하는 체르노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알려진 트란스니스트리아 공화국 등에서 작가가 울고 웃고 분노하고 회한에 떨었던 기록을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필자 유재현씨는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한때 벤처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세계적 시각에서 한반도의 현실을 읽어낸다는, 그 나름의 기행·글쓰기 작업을 실천하고 있다. 소설 〈시하눅빌 스토리〉, 역사문화 기행문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등을 썼으며,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한국 현대사를 통찰하는 대하소설을 쓰고 있다.


새벽의 어둠이 채 물러가지 않은 때에 도착한 조지아(그루지야) 트빌리시의 공항 터미널. 유리벽 밖은 수은등 아래 수북이 쌓인 눈으로 눈이 부시다. 이런 때에 코카서스 산맥에는 오를 수 있을까. 문득 마음 한구석에 작은 근심이 자갈처럼 가라앉는다.

그루지야이거나 조지아. 한국에서도 대개는 그루지야로 불렸지만 대통령인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조지아’로 호칭해주도록 국제사회에 공식으로 요청한 후에는 대개 이를 따르고 있다. 미국에 조지아라는 주(州)가 있고 미국이 워낙 유명(?)한 나라인 까닭에 혼선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집한 데는, 사카슈빌리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관련 있을성싶다. 조지아는 흔히 서방에서 쓰이는 이름이고 그루지야는 옛 소련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호칭이다. 조지아가 농업을 함의하고 있다면 그루지야는 ‘늑대의 땅’이란 의미를 띤다(조지아가 ‘성 조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코카서스 산맥과 접한 나라이고 사카슈빌리가 다분히 호전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조지아보다는 그루지야 쪽을 선호할 법한데 현실은 반대이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두 공화국,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의 존재를 고려한다면 이해할 만하다. 2008년 사카슈빌리는 러시아를 상대로 도발하다시피 벌인 전쟁에서 대패했다.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사메바 대성당 아래에 위치한 숙소를 나서 꽁꽁 얼어버린 거리를 걷는다. 트빌리시의 남쪽인 이 지역은 구시가지로, 볼거리는 모두 이곳에 몰려 있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메테히 다리의 난간 앞에 선 동상들이 부르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산에 둘러싸여 있고 므츠바리(쿠라)강이 흐르는 트빌리시는 어쩐지 서울을 닮았다. 다리에서는 12세기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강둑 위의 메테히 정교회를 올려다볼 수 있다. 그 앞으로 5세기 말에 트빌리시를 세운 바흐탕 고르가살리가 말에 올라탄 동상도 함께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은 숲이었다. 어느 날 매를 들고 꿩 사냥에 나선 고르가살리는 매와 꿩이 숲 속의 뜨거운 연못에 떨어져 둘 다 죽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숲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도시를 세우라고 했고, 이로써 트빌리시가 탄생했다. 뜨거운 연못이란 물론 온천이다. 이름에 걸맞게 트빌리시에는 오래된 이슬람 풍의 유황온천도 있다.

‘따뜻한 도시’ 트빌리시이지만 코카서스 산맥에서 냉기라도 흘러내려오는지 겨울은 몹시 춥다. 구시가지의 길바닥에 관광객이라고는 눈을 부릅떠도 보이지 않지만 즈브리스 마마 성당은 모여든 시민으로 입구부터 북적인다. 맞은편의 시오니 성당도 마찬가지다. 구시가지에는 정교회 성당은 물론이고 시너고그(유대교 회당)와 가톨릭 성당, 모스크(이슬람 사원)까지 남아 있어 모두들 사이좋게 어울려 살았던 때도 있었음을 증언해준다. 19세기 초에 모습을 드러냈던 ‘자유광장’은 구시가지의 중심에 해당한다. 첫 이름은 예레반 광장이었고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잠시 등장했던 조지아 공화국 시기에는 자유광장, 그 뒤 소련 시절에는 비밀경찰국장인 베리아의 이름을 딴 광장이 되었다가 이내 레닌 광장이 되었다. 이름이 바뀐 시절을 통틀어 이 광장이 속삭이는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1907년의 티플리스(트빌리시의 옛 이름) 은행 강도 사건이다.

20명 행동대원, 거액의 은행털이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종횡무진의 활약을 보이던 바로 그 무렵 대서양 건너편, 코카서스 산맥 남쪽에도 그들 못지않은 은행 강도가 있었으니 ‘볼셰비키’였다. 미국 서부시대의 은행 강도들을 모두 조무래기로 만들어버린 이 사건은 그 주모자가 레닌, 스탈린, 리트비노프, 크라신, 보그다노프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었다. 그 은밀함도 혁명 거사를 방불케 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5차 당대회가 강도와 살인을 금지하는 결의를 통과시킨 뒤였기 때문이다.

혁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거사였으나 당이 만천하에 금지를 공포한 은행털이의 행동대장은 스탈린의 동지였던 카모. 이 둘을 포함해 20명의 행동대원들이 1907년 6월26일 삼엄한 감시 속의 예레반 광장에 포진했다. 무장 경비원과 돈을 실은 마차가 러시아 제국은행 티플리스 지점을 떠나 우체국으로 향했다. 인파로 혼잡한 광장에 마차가 진입했을 때 수류탄이 투척되었고 총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마차를 향해 폭탄이 던져지고 광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돈 자루는 마침내 카모의 마차로 옮겨졌고 군인과 경찰이 출동한 가운데 카모의 마차는 전속력으로 광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곧 충돌한 병력과 마주쳤지만 기병대 군복으로 위장한 카모가 ‘돈은 안전하다. 시급히 광장으로 가라’고 외치자 의심하지 않고 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탈취에 성공한 돈은 무려 31만 루블에 이르렀다. 지금으로는 350만 달러(약 40억원)에 해당한다.

이 돈은 스탈린과 카모에 의해 핀란드의 레닌에게 전달되었지만 일련번호로 추적당하기 쉬운 500루블 고액권은 사용하기가 무척 어려웠고 추적 불가능한 소액권은 9만1000루블이었다고 한다. 이후 무기 구매를 위해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던 카모는 베를린에서 밀정의 고발로 체포되었고 러시아로 이송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실성을 가장해 정신병동으로 옮겨진 후 탈옥에 성공한 카모. 불굴의 정신으로 다시 무장 강도를 계획했지만 거사 직전에 잡혀 1911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1913년 천행으로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을 맞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카모는 1917년 혁명으로 풀려났으나 192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카모의 묘는 지금의 자유광장 옆 푸시킨 공원에 기념비와 함께 마련되었지만 스탈린 시대에 어디론가 옮겨져 지금은 볼 수 없다.

광장의 중앙에 세워졌던 레닌 상은 1991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2006년 완공된 자유탑이 세워져 있다. 대리석 탑 위의 동으로 만들어진 말 탄 성 조지 상은 진짜 금으로 도금되어 있는데 서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좀 심상하게 보인다. 레닌만 없어진 것이 아니다. 광장에 접한 루스타벨리 대로의 의사당 건물 지붕 전면에는 원래 소련 문장이 새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투박하게 패어 달아나버린 흔적이 역력하다.

더욱 비참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장미혁명 광장 인근의 이멜리(Imeli) 건물이다. 소련 초기의 거장 건축가 알렉세이 슈세프의 작품인 이멜리는 스탈린 시대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로 1938년 완공되어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가 사용했다. 독립 후에는 헌법재판소가 입주했다. 슈세프는 건물뿐 아니라 인테리어까지 도맡아 문 손잡이와 전등에 가구까지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철거 중이던 건물은 흉가를 방불케 한다. 이멜리의 철거는 트빌리시 시민들의 만만치 않은 저항을 불러일으켜 문화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철거중단 청원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흔적은 빌딩을 둘러싼 벽에 스프레이로 거칠게 적은 철거중단 구호로 남아 있다.

흉가를 방불케 하는 이멜리의 비극

레닌 상의 철거가 정치적인 동기라면 이멜리의 철거는 순전히 경제적 이유에서다. 2007년 중앙부처인 문화·유적보존·스포츠부는 문화유산 보존대상 명단에서 이멜리를 삭제함으로써 이 건물의 운명을 뒤바꾸어버렸다. 그 직후 이멜리는 외국 호텔자본에 팔렸고 특급호텔 용지를 조성하기 위해 철거되기 시작했다. 철거공사는 거센 항의로 중단되었지만 이미 본관과 연결된 4개 부속건물 중 하나와 내부 전체가 철거되었고 지붕의 일부 또한 해체된 상태이다. 이멜리의 운명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소련 해체 후 독립한 국가들은 너나 없이 시장경제를 급속하게 추진하는 동시에 외국 자본 유치에 총력을 질주했다. 그 와중에 온갖 국유재산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일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고 이권을 챙긴 올리가키(마피아 재벌)들이 부를 독점하고 신흥 지배계급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올리가키뿐만 아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다국적 자본들까지 몰려들어 시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 행세를 하기에 분주했다. 이제 더는 팔아먹을 것이 없어진 것일까. 7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트빌리시의 문화유산 이멜리까지도 마침내 하이에나들의 먹이로 던져졌다.

이멜리와 우체국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둔 장미혁명 광장. 2003년 당시의 셰바르드나제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 항거를 기념하는 광장이다. 당시 군중집회는 이곳이나 자유광장에서 주로 열렸다. 셰바르드나제는 고르바초프 시절 소련 외무장관을 지낸,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하나였다. 독립 후 대통령에 선출된 감사후르디아가 군사 쿠데타로 축출된 후 그 주도 세력들이 셰바르드나제에게 손을 내밀자 조지아로 돌아와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일찍이 그루지야 공산당 서기장으로 부정·부패 일소에 앞장섰지만 정작 자신이 권력을 잡은 독립 조지아에서는 유난히 측근에 의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2003년 선거에서 승리해 다시 집권했지만 부정선거로 낙인찍힌 데다 대중의 불만이 극에 달해 시위가 지속되는 가운데 군부 또한 등을 돌려 결국은 대통령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권력은 집권당 출신인 사카슈빌리에게 넘어갔다. 이것이 장미혁명이다. 뭐가 달라졌을까.

서방의 등 돌리기와 반정부 세력 지원

한때 소련을 대표했던 셰바르드나제는 조지아로 돌아와 권력을 잡은 뒤에는 미국과 유럽 편향의 정책을 유지했다. 서방 또한 그런 셰바르드나제를 경제적·외교적으로 지원했다. 시장경제 또한 급속하게 도입해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또는 본원적) 축적을 완성하는 동시에 부정·부패도 만만치 않게 발달시켰다. 그런 셰바르드나제가 광범위한 대중적 저항으로 몰락한 이면에는 서방의 등 돌리기와 반정부 세력 지원도 있었다. 집권 말기에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등은 경제지원 축소에 나서는 한편 반정부 세력들에 대한 재정 지원을 확대했다. 2003년 선거에서는 미국과 유럽연합 등이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국제 선거감시단의 활약이 없었다면 부정선거 시비가 그처럼 확대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거 후 부정선거 시비가 불거지자 서방은 기다렸다는 듯 극렬하게 셰바르드나제 정권을 비난했다. 2003년 선거가 공정했을 리는 없지만 그건 이전의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정권을 바꾸는 데에는 억만장자 소로스와 같은 인물이 지대한 기여를 했다. 소로스는 공공연하게 사카슈빌리를 지원했다. 지원의 핵심은 물론 돈이었다. 장미혁명 후 사카슈빌리가 권력을 잡았을 때 조지아에서는 소로스가 셰바르드나제를 사카슈빌리로 바꾸었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장미혁명으로 정권은 바뀌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부정·부패는 여전했고 이멜리의 경우에서 보듯 팔아먹을 국유재산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행태도 여전하다.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는 장미혁명의 재판처럼 보였다. 가까스로 재선된 사카슈빌리에게는 부정선거 의혹이 쏟아졌다. 곤경에 빠진 사카슈빌리가 찾은 돌파구가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이었다. 사카슈빌리의 불을 보듯 뻔한 불장난으로 항구도시 포티를 비롯해 고리·세나키·주그디디 같은 도시가 잠시나마 러시아군에 점령되었고 트빌리시는 공습까지 받았다. 끔찍한 일은 1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헤아릴 수 없는 전쟁 난민이 발생한 것이다.

엉뚱하게 혁명이란 칭호를 붙여 본질을 호도하는 일은 동서의 현대사에서는 드물지 않다. ‘5·16군사혁명’이라거나 뭐, 이런 따위들이 그렇다. 장미혁명도 성질은 다르지만 본질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장미혁명 광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장미도 혁명도 아닌 강변을 향해 느닷없이 20층으로 우뚝 서 있는 인터내셔널 특급호텔 ‘래디슨 블루’이다.

기자명 유재현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