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가연합(CIS)과 동유럽. 한국인들에게는 한때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공포의 땅이었으나,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는 전쟁과 학살, 마피아, 경제적 혼란으로 표상되는 나라들이다. 작가 유재현이 지난 6개월여 동안 CIS와 동유럽의 깊숙한 내면을 탐사하고 돌아왔다. 〈시사IN〉은 지금도 방진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야 하는 체르노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알려진 트란스니스트리아 공화국 등에서 작가가 울고 웃고 분노하고 회한에 떨었던 기록을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CIS 국가를 여행하다 보면 소련 연방을 통틀어 가장 유명했던 몇 가지를 귀동냥으로나마 알게 된다. 와인으로는 몰도바(지금의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푸카리, 브랜디(코냑)로는 역시 몰도바의 크빈과 아르메니아의 아라랏. 조지아 또한 와인으로 명성이 높지만 딱히 독보적인 브랜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조지아의 이것만은 연방 전체에서 독보적인 명성을 차지했고 지금도 유지하고 있음을 모두 인정한다. 다름 아닌 탄산광천수 보르조미.

하여 트빌리시에 도착한 첫날 숙소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가장 먼저 움켜쥔 것이 바로 그 보르조미였다. 지금도 40여 개 나라에 수출되고 있는 보르조미는 조지아의 3대 수출 품목 중 하나인데 옛 소련 시절부터 그랬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 1980년대에는 연간 4억 병씩 수출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못하다.


테이블 위에 뚜껑을 따놓고 마치 진귀한 와인을 음미하듯 한 모금씩 마셔본다. 뭐랄까. 탄산수인데도 입안에서 머금을 때와 목구멍을 넘어갈 때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다. 탄산수 특유의 씁쓸한 뒷맛도 없이 담백하다. 그 밖에 특유의 맛이 혓바닥을 맴도는데 이건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흠, 명성에 제값을 한다.

보르조미 탄산수의 그 오묘한 맛

조지아의 흑해 연안도시인 바투미에 가던 중 잠시 들른 보르조미는 물의 그 맛과 어울린다. 바쿠리아니 산맥을 끼고 므츠바리 강이 흐르는 보르조미 계곡에서 산세가 완만한 분지에 자리 잡은 이 도시에는 한때 ‘코카서스의 진주’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제정 러시아 때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휴양도시로 남아 있지만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마도 한겨울이기 때문일 것이다. 눈 덮인 다운타운은 그저 쓸쓸하고 보르조미 공장은 또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트빌리시에서 바투미로 가는 길의 3분의 1쯤은 산길이어서 꽤 고생스럽다. 거리를 시속으로 나누어 여행시간을 계산하면 필히 곤경에 처하게 되는 길이다. 게다가 밤중의 산길이라면 더욱 더디게 마련이다. 보르조미에서 시간을 빼앗긴 탓에 바투미에 도착한 것은 자정 무렵이다. 한밤의 길에서 도시나 마을을 지날 때 휘황한 불빛의 크고 작은 건물들을 만나면 그게 조지아에서는 경찰서다. 외벽이 온통 유리인 데다 조명까지 아낌없이 쓰고 있어 낮이든 밤이든 내부를 그대로 볼 수 있다. 2004년 집권 초기의 사카슈빌리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찰 개혁의 산물이다. 경찰의 수장이며 부패의 화신으로 소문난 내무장관을 쫓아내고 경찰 3만명을 일시에 해고하는 전대미문의 개혁은 이후 3개월 동안 경찰 없는 조지아를 실현했다.

그동안에 별일이 없었고 시민들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으며 그걸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카슈빌리도 군대와 더불어 공권력의 양대 축 중 하나인 경찰 없이 나라를 통치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 3개월 동안 경찰을 새로 모집하고 속성으로 훈련시킨 후 거리로 내보냈다. 완벽한 물갈이였다. 새로운 경찰은 대부분 젊은이였고 구시대의 경찰이 상관으로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을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경찰 급여를 현실화해 뇌물을 받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에 비해 급여를 20배 이상 올렸다면 더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 본부에서부터 일선 경찰서까지 모두 밖에서 투명하게 내부를 볼 수 있는 유리 건물로 만들었다.

발가벗은 투명한 경찰, 부패 없는 경찰의 탄생이었다. 조지아 국민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조지아 국민뿐 아니었다. 아르메니아 국민도 어깨춤을 추었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 조지아의 트빌리시까지 자동차로 여행하는 데 순전히 조지아 경찰에게 주는 뇌물만 평균 7번에 걸쳐 100달러가 들었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으로도 터키로도 국경이 막혀버린 아르메니아에서 그나마 열려 있는 조지아 국경을 통과해 달리기가 그토록 어려웠으니 그 나라 국민들이 덩실덩실 춤을 출 만도 했다.

조지아의 경찰 개혁은 타산지석의 교훈을 준다. 더러운 인간들을 그대로 둔 채 개혁이란 언감생심이다. 개혁에는 인적 쇄신이 필수적이며 가장 좋은 것은 남김없이 모두 갈아버리는 것이다. 또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임금을 주면서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탐욕을 부리면 응징한다. 50달러 이상의 뇌물에 10년 이상의 징역형이 조지아 경찰 개혁의 주요 내용 중 하나였다.

좀 어두운 측면도 말해보자. 길바닥의 소소한 부정부패가 사라졌다고 해서 부패의 몸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조지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우리의 경우 길바닥의 교통경찰이 벌금딱지를 5000원의 뇌물로 갈음하던 때는 1990년대 초쯤에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한국의 부패지수는 여전히 상위권에 머물러 있고 윗물에서 노는 자들의 부패 스케일은 더욱 세련되고 교묘해짐과 함께 더욱 비만해졌다. 따라서 사회를 진정 부패의 도가니에서 구하는 개혁을 할라치면 먼저 위를 쳐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백년하청에 지나지 않는다.

사카슈빌리의 경찰 개혁의 초점은 온전히 길바닥 인심을 구하는 데에만 맞추어져 한계가 분명했다. 개혁에서 비밀경찰이라 불리던 특수수사과·보안과·방첩과는 제외되었다. 2007년의 정치적 위기에서 사카슈빌리가 2008년 조기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 가운데 승리를 거둔 데에는 이들 정치 경찰의 반정부 세력에 대한 사찰, 탄압, 부정선거 지원 등의 활약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것이 길바닥의 경찰이 시민에게 사랑받는 나라인 조지아의 통치자 사카슈빌리가 국민으로부터 결코 사랑받지 못했던 이유이고 경찰이 결코 개혁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2012년 총선에서 사카슈빌리의 ‘통합민족운동’은 친러시아 성향의 미디어 재벌 출신인 이바니슈빌리가 이끄는 ‘조지아의 꿈’에 패배했다.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에 있는 바위산에 구멍을 뚫어 만든 가레자 수도원으로 가는 길. 마른 잡초들의 줄기가 눈 사이를 비집고 나와 누렇게 물들인 평원 뒤로 완만한 바위산이 지나가고 그 능선이 국경이다. 길을 잘못 들어 그 평원을 헤매다 만난 중년 사내에게 길을 물어야 했다. 조지아 말은 할 수 없을 테니 러시아 말을 건네지만 사정이 달라질 리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소련이 킬로미터를 표준으로 썼다는 것이다. 길옆에서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찾아든 사내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고 눈 위에 숫자를 쓰며 말한다. ‘킬로미터.’ 다시 또 다른 방향을 가리킨 후 숫자를 쓰고는 말한다. ‘킬로미터.’ 그렇게 세 번을 들었다. 그 숫자란 것이 소수점 이하 한 자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난 그게 정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리계에서 눈을 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악스럽게도 아날로그 거리계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오차는 눈금 하나, 100m에 못 미쳤다. 시장이건 식료품점이건 늘 저울이 있고 또 대개의 가격이 항상 킬로그램 단위로 매겨져 있는 걸 보면 CIS 사람들이 계량에 익숙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만, 변방의 오지인 이곳 들판의 농부도 이처럼 정확하다. ‘이리 가다 저기로 가서 한참 쭉 올라가시우’와는 사뭇 다르다.

이미 한 번 아나누리 다리에서 더 가기를 포기하고 돌아왔던 코카서스 산맥으로 다시 향했다. 이틀 동안은 날씨도 제법 푸근했고 트빌리시의 뒷골목에 쌓였던 잔설이 녹기도 했다. 개미 한 마리 없던 아나누리 성채에 관광객이 모여 있고 다리 앞에서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좌판까지 벌여놓고 있어 꽤 고무적이다. 역시 두물머리인 이곳은 아래쪽의 댐이 물을 가두고 있어 다리와 성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호수와 같다. 며칠 전 성채의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던 작은 키오스크에는 노인 둘이 난로 옆에 앉아 불을 쬐고 있다. 키오스크 앞에 걸려 있던 늑대와 곰 가죽을 가리키니 누군가를 불러온다. 아직 오전이건만 거나하게 취해 있다. 대화가 통할 방법은 없지만 몇 마디 알아들을 만한 단어와 몸짓으로도 약간의 의사소통은 어디서나 가능한 법이다. 노인은 폴란드 출신이다. 늑대와 곰은 자신이 잡은 것이라며 옆에 있던 구식 장총을 들어 보인다. 코카서스의 늑대 사냥꾼이라. 썩 잘 어울리긴 하는데 불려온 후에도 연신 보드카를 들이켜는 이 노인. 고향이 그리운 것이다. 어쩌다 폴란드에서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일까.

조지아 군사도로에서 곡예운전을

아나누리를 뒤로하고 다시 떠난 길. 조지아 군사도로로 불리는 이 길은 오세티야 군사도로와 함께 러시아로 통하는 두 개의 길 중 하나이다. 지금은 남오세티야를 통과할 방법이 없으니 조지아에서는 이 길이 유일하다. 국경은 2010년 이후에 열렸고 터널을 통과한다. 백설에 덮여 있는 길은 위태위태하다.


어느 경사진 길 옆으로 터널이 보인다. 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군용 터널이다. 겨울에만 사용되었던 터널이지만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군사도로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8세기 말 제정 러시아군이 처음으로 이 길을 뚫으면서이다. 제정 러시아의 코카서스 정복에 지대한 기여를 한 도로이다. 길의 백미는 해발 5033m의 카즈베크 산이다. 길을 달리는 내내 계곡 사이로 보이고 사라지고를 거듭하는 카즈베크 산은 풍경이 일신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버티고 있어 마치 이정표와 같다. 계곡은 점차 좁아지고 협곡을 달리는 경우가 잦아진다. 아마도 마지막 마을. 경찰들이 차를 세운다. 차를 세운 젊은 경찰은 고개를 흔들며 허공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린다. 승용차로 오를 수 없으니 돌아가라는 뜻이다. 내 바람은 그저 갈 수 있는 곳까지는 갔으면 하는 것이다. 한동안 떠나지 않고 농성을 하다시피 했더니 누군가 나와 바퀴를 살핀다. 낡지도 않았고 스노타이어다. 서넛이 모여 잠시 떠들더니 그중 하나가 돌아와 고개를 끄덕인다.

마을을 지나자 본격적인 아리랑 경사인데 낭떠러지 쪽으로 설벽이 차의 높이 정도로 올라와 있다. 다행인 것은 트랙터가 눈을 밀었고 그 뒤로 다시 눈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오르다 헛돌면 차를 돌리기도 난망한 길이다. 자칫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면 코카서스 산맥의 품에 영원히 안길 판이다.

길은 조지아 군사도로의 리조트 마을인 구다우리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끝났다. 제설용 트랙터 한 대가 서 있는 뒤로 승용차 보닛 높이만큼 눈이 쌓여 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온다. 구다우리에서는 소련 시절 만들어진 러시아·조지아 우정의 기념비가 바로 코앞이다. 걸어서라도 가보련만 장비 없이는 걸을 수도 없는 길이 되어 있다. 열두 개의 반원 아치를 두고 돌과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거대한 기념비에는 모자이크 타일화가 붙어 있다. 바투미에서 폐허로 변한 담배공장의 내벽에 여전히 남아 있는 타일화를 본 후에는 꼭 보고 싶었던 그림이었다. 담배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을 표현한 타일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현실과 그 현실에서 비롯된 꿈과 희망을 단순하지만 분방하게 그것도 모자이크로 표현한 그림이었다. 혹시 트랙터가 움직일지도 몰라 1시간을 넘게 기다렸지만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해는 이미 기울고 있다. 산중의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에 트빌리시로 돌아왔다. 조지아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기자명 유재현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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