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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중립’이라는 기막힌 착각

정치 공동체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내가 취하는 정치적 지향점이 중립’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공공재인 좌표계를 건드려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행위이다.

배명훈 (소설가) 2012년 09월 27일 목요일 제2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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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한 어느 느슨한 모임에는 보수주의자가 한 분 계신다. 평소 꽤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정치적인 활동도 제법 하는 분이라 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그분이 오른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는데, 어느 날 그분이 우리 쪽을 돌아보며 “당신들 극좌파야?” 하고 묻더란다. 혼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거라고만 생각했던 그분은, 사실은 혼자서가 아니라 좌표계를 손에 든 채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좌표계는 중요한 공공재다. 세상 모든 천문대가 어느 중립 지점, 예를 들면 적도 같은 곳에 나란히 위치할 필요가 없는 건, 바로 좌표계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북위 50도 지점에 세워진 천문대와 남위 65도 지점에 위치한 천문대는 태생적으로 편향된 자신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고 각각 자기 눈에 비치는 밤하늘만 열심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서로 동일한 우주를 관측할 수 있다. 각각의 천문대가 자신이 정확히 얼마나 편향되어 있는지만 알고 있다면 그 편향된 지점에서 한 관측의 결과는 별로 어렵지 않게 보편적인 지식 안에 포함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편향된 곳으로 달려가면서 그 좌표계를 자꾸 가지고 가버린다. 북위 50도에 위치한 어느 천문대가 갑자기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이 적도라고 선언해버리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난나 http://www.nannarart.com/sisa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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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취하고 있는 정치적 지향점이 중립이라고 선언해버리는 일, 그렇게 새로이 정의된 좌표계에 따라 자신보다 왼쪽에 있는 모든 사람을 ‘좌파’ 혹은 ‘종북’이라고 선언해버리는 사태,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그렇다. 이것은 누군가가 카페 화장실 열쇠를 집으로 가져가버리는 것만큼이나 곤란한 일이다.

우주정거장이 떠 있는 궤도에서는 지구 중력이 원심력에 상쇄되어 무중력처럼 느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지구 중력 방향인 ‘아래’를 감지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방향감각을 전부 잃어버린다. 좌표계의 기준점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가끔 지구에서 우주선이 날아와 사람과 물자를 옮겨 싣기 위해 그 우주왕복선과 도킹을 하게 되는데, 이때 두 우주선의 출입구를 정확하게 맞추는 작업을 하고 있던 양측 우주비행사 사이에 새롭게 합의된 좌표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대단히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좀 더 오른쪽으로!”라는 지시를 받은 상대편 우주비행사가 자기 기준에서 오른쪽으로 기체를 이동시켜버리는 일 같은. 그래 가지고는 몇 번을 시도하든 도킹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 더 성숙하다는 착각

사람들은 종종 타인에게 중립을 권유하곤 한다. “○○○가 ○○나 하지 정치 이야기는 무슨!” “여기서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씨, 정치 성향을 너무 드러냈네!” 그리고 그런 권유와 강권과 압력은 나 같은 창작자는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검열로 작용한다. 중립 검열이라고 불러야 할 이 검열은,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 더 성숙하고,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문제는 편향 자체가 아니라 편향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나는 중간에 있다!”라고 외치는 행위가 아닐까. 정치 공동체 속에서 인간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편향된 정치적 관점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는 일보다는 서로의 편향성을 인식하기 위한 공공재인 좌표계를 건드려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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