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상담만큼이나 중요한 게 퇴로 상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건 아무도 안 해준다.

전략에서 퇴로는 대단히 중요하다. 흔히 “보급로가 끊기면 진다”라고 말할 때의 그 길은 보급로인 동시에 퇴로인 연락선(lines of com– munication)이라는 길이다. 그런 격언이 만들어졌을 법한 기간 내내 식량은 현지 조달이 원칙이었을 테니, 끊으면 이기게 되는 선이란 건 사실은 보급로가 아니라 퇴로였던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퇴로가 끊기면 안 되는 이유는, 원치 않는 곳에서 모든 것을 건 싸움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사태는 퇴로가 끊긴 쪽에도 절망적인 일이겠지만 퇴로를 끊은 쪽에도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손자병법〉에서 적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한쪽을 열어주라고 한 것도 그래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것이다.

손자는 아군을 사지에 넣고 스스로 퇴로를 다 끊어서 농민 병사들이 전사로 거듭나는 효과를 활용하라고 충고하고 상대는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하라고 충고하는데, 이때 손자가 노린 건 그 절망적인 순간에 튀어나오는 ‘죽을 힘’이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나 조미니 같은 근대 전략가들은 그 반대를 주문한다. 아군의 퇴로를 절대 끊지 말고 적의 퇴로는 반드시 끊으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손자는 훈련 안 된 농민들로 구성된 군대를 가정하고 있어서 그들을 전사로 만들 방법이 많지 않았던 반면, 2000년 뒤 사람들은 스스로를 바닥으로 몰아넣지 않고도 훈련이나 제도로 사기를 높이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후자에 동의한다. 배수진에서 나오는 ‘죽을 힘’은 딱 한 번밖에 기회가 없다. 하지만 퇴로에 든든한 요새가 자리 잡고 있는 부대는 작은 전투에서 패해도 계속 다시 일어난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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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퇴로 상담을 해주지 않는다.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하지 않으면 뭔가 대충대충 하는 걸로 보는 경우도 많다. 일부러 도전자들의 퇴로를 끊기도 한다. “다시는 이 바닥에 발 못 붙이게 하겠다”라는 협박은, 〈손자병법〉식 사지(死地) 전략과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사기를 일깨우는 가장 손쉽고 저렴한 방법 말이다.

교육과 제도 정비된 사회에서 함부로 배수진 펴서는 곤란

잃을 게 아무것도 없었을 때 그 전략은 꽤 유용했을지도 모른다. 굶주린 농민을 전사로 탈바꿈시켰을 테니까. 그러나 사지에 처하지 않고도 교육과 제도로 전문성을 추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회라면 함부로 배수진을 펴서는 안 된다. 요즘 종종 눈에 띄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이미 몇 년 전에 이라크에서 승전을 선언하고도 지금까지 철수를 못하는 미군의 상황에서 보듯이, 퇴로 없이 함부로 뛰어든 승부는, 승자마저도 진퇴양난의 난국에 빠뜨릴 수 있다. 그만큼 뒷감당이 어려운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잃을 게 너무 많은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선진화된 사회의 도전 정신은 패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안전망에서 비롯될 때 더욱 지속적이고 활발해질 수 있다. 실패하면 등 뒤에 바짝 죽음이 따라붙는 삶보다는 퇴로가 있는 삶이 더 건강하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는 좀처럼 퇴로 상담을 안 해주는 사회다. 아니, 사실은 상담해줄 퇴로 자체가 별로 없는 사회다.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누군가 우리 사회 전체의 거시 전략을 다시 손보려 한다면 그가 가장 먼저 정비해야 할 것은 진로가 아닌 퇴로가 아닐까.

기자명 배명훈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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