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해병대원이며, 정부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프리랜서 요원 말로리 케인. 바르셀로나에서 납치된 저널리스트를 구해내자마자 다시 더블린으로 파견된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함정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더블린을 빠져나온 말로리는 복수를 다짐한다.

〈헤이와이어〉는 단순한 복수극이다. 게다가 말로리 역을 맡은 지나 카라노는 한때 UFC의 라이벌 단체였던 스트라이크포스의 챔피언을 지낸 종합격투기 선수다. 배우와 줄거리만으로 보면 영락없는 B급 액션물. 하지만 감독이 스티븐 소더버그라는 것을 알면 관심이 쏠린다. 첫 장편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1989년)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줄리아 로버츠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에린 브로코비치〉(2000년)와 조지 클루니·브래드 피트·맷 데이먼 등을 총출동시킨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로 대중을 사로잡은 스티븐 소더버그.

그러나 스티븐 소더버그의 진짜 강점은 유명한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오션스 일레븐〉과 같은 해에 만든 〈트래픽〉은 치열한 마약전쟁을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담아낸 독창적인 영화였고, 인터넷으로도 공개된 저예산 영화 〈버블〉, 체 게바라의 이야기를 담은 2부작 〈체〉, 고급 콜걸의 일상을 인터뷰 스타일로 그려낸 〈더 걸프렌드 익스피어리언스〉 등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들며 형식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풍성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작년에 개봉한 〈컨테이젼〉은 악성 바이러스 때문에 세계 전체가 혼돈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스티븐 소더버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오로지 상황만을 추적한다. 가족과 친구가 죽어 나가고, 감염 경로를 찾으려던 과학자마저 감염되고, 정부의 음모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발언권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도 〈컨테이젼〉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듯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컨테이젼〉을 극적인 상황으로 보여주고 싶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소더버그는 각각의 에피소드와 캐릭터들에 존재하는 엄청난 드라마들을 그저 스쳐 지나간다.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가 세상에 드러나는 지점이 흔히 그렇듯이.


종합격투기 같은 건조한 복수극

〈헤이와이어〉도 지극히 건조하다. 한때 연인이었던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는 상황에서도 말로리는 지극히 냉정하다. 감정이 없는 건 전혀 아니다. 자신을 배신한, 그녀를 함정에 몰아넣은 자들을 끝까지 추적하는 이유는 논리가 아니다. 복수심으로만 따진다면, 〈킬 빌〉의 그녀 못지않다. 〈킬 빌〉이 의도적인 과장으로 복수의 희열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헤이와이어〉는 복수의 과정을 실제 격투기처럼 둔탁한 사실감으로 그려낸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1960년대 스타일의 스파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우연히 시합 장면을 보고 반했던 지나 카라노를 기용해 ‘진짜 싸움’을 만들어냈다. 〈헤이와이어〉의 액션 장면에서는 음악이 전혀 나오지 않고, 몸과 몸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강렬하게 고막을 흔들어댄다. 종합격투기에서 육체와 육체가 맞부딪치는 긴장감이 짜릿하게 전달되는 것처럼, 〈헤이와이어〉는 액션은 물론 드라마에서도 날것의 생생한 긴장이 드러난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기록과 유희,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흐름 속에서 〈컨테이젼〉과 〈헤이와이어〉가 인상적인 이유는, 상업적인 드라마를 거부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예술적 상징이나 의미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심플한 의연함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기자명 김봉석 (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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