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적중률이 형편없는 대선 후보 여론조사도 이어졌다. 1980년생 김애란의 등장을 앞둔 2002년 초. 그해 신춘문예의 특징은 ‘일상성의 전면화’였다.

외환위기의 아픔을 다룬 작품이 비로소 사라졌다. 사회고발 소재가 떠난 자리를 가족, 개인의 방황 따위가 채웠다. 소설가 김원일은 ‘젊은 룸펜이 지하방이나 옥탑방에 혼자 살면서 애인과 섹스를 나누지 않으면 비디오를 빌려다 보고 라면을 끓여 먹는 식의 이야기’가 응모작의 대종을 이뤘다고 심사평을 전했다.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응모자는 3000명, 작품은 1만여 편이었다. ‘일상성’의 풍요 와중에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다. ‘남다른 상상력’ ‘자기비판의 늠름한 선언’ 등 평론가의 찬사가 붙은 수상작들이다. 새해 첫날, 해돋이 사진이 실린 일간지마다 수상작 전문을 실었다. 문학잡지도 신인을 발표했다. 


ⓒ그림 이우일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이문재 시인은 “시인이 되고 나면 세상이 한번 뒤집힐 것 같지만, 세상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어떤 시, 어떤 시인이 되느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등단 작가들은 세상을 뒤집을 것같이 벅찬 순간은 가물가물할지라도, 당시의 심정은 기억하고 있었다. 〈시사IN〉은 2002년 등단한 데뷔 10년차 작가들의 근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 8개 일간지와 〈현대문학〉 〈문학동네〉 〈문학사상〉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문예중앙〉 〈실천문학〉 등 7개 문학지의 시·소설·평론 분야 10년차 작가 48명을 수소문했다. 이 중 소식이 닿지 않는 이들을 뺀 34명의 근황을 파악했다(이 중 1명은 사망). 2002년 당선 작가의 10년은 작가로 산다는 것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전체 48명 중 한 권 이상 단행본을 낸 작가는 30명이었다. 1권을 낸 작가가 12명으로 가장 많았고 2권이 10명, 3권이 5명, 4권 이상이 3명이다. 최근 2년 동안 작품집을 낸 사람은 고작 5명이었다.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오창은 평론가는 “등단이 입구라면, 단행본은 자기 방을 만드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단행본 출간은 본인의 세계관에 입각해 방을 만들고 꾸미는 작업이라는 의미다. 처음 2~3년이 중요하다. 매년 100명 이상 신인이 쏟아지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 인상적인 작품을 남겨야 한다.


33명 중 전업 작가는 3명

타계한 조영관 시인(〈실천문학〉 등단)을 제외하고 근황이 파악된 33명 대부분은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한다고 답했지만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직장 생활과 병행하기 어려움, 문학적 좌절, 육아 문제 등 이유가 다양했다. 현재 교수·겸임교수·강사 등으로 대학 강단에 서는 이가 13명, 출판계 등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 8명, 주부 4명, 아르바이트 4명, 군인 1명이었다. 전업 작가는 3명에 불과했다.

등단을 했다고 글로 밥벌이를 하겠다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에서 ‘가문비 냉장고’로 데뷔한 김중일 시인은 애초부터 시인 전업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시 한 편에 고료가 5만~7만원이다. 시만 써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등단 작가라면 거개가 잠시나마 착각을 한다. 오창은 평론가의 경우다. 마침 적을 두었던 학내 계약직 자리가 끝난 시점에 등단 소식을 들었다. 시간강사 생활하면서 열심히 글을 쓰면 빠듯하더라도 한 몸 건사하는 일은 가능하리라고 기대했다. 1년이 지나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강사 급료는 한 달 50만원. 2002년 한 해 원고료 수입이 60만원이었다. 1년간 계간지 3편에 글을 썼다. 신인치고는 찾는 데가 많은 편이었지만 글로 인한 수입은 당선 상금 200만원에 원고료 60만원이 전부였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문인이 많은 건, 문학과 유리되지 않으면서도 최소한의 생계를 꾸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작가가 많기 때문이다. 강단에 서는 13명 중 8명이 ‘시간강사’였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한 소설가는 “어쩌다 한번씩 강의를 하지만 사실상 무직 상태다. 등단과 동시에 독배를 마신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에서 ‘수’로 등단한 소설가 권정현 역시 학기 중 문예창작 강의를 한다. 그는 〈굿바이 명왕성〉 〈달팽이의 뿔〉 2권의 소설집을 냈다. 1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26㎡(8평) 원룸에 앉아 글을 쓸 때가 가장 신난다. 작가 생활을 하는 게 감사한 일이다 싶다가도,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또래를 만날 때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다. 특히 등단 2년까지가 고비였다. 일을 그만두고 골방에서 글만 썼다. 장편을 써서 다시 권위 있는 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봉천동·신림동의 옥탑방과 지하방을 돌며 본인을 점점 구석으로 몰아세우다 정신이 번쩍 들어 현실로 돌아왔다. 


ⓒ경향신문2012년 경향신춘문예 시상식이 1월13일 열렸다. 분야별 수상자들이 앞줄에 앉아 있다.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데뷔한 조동범 시인도 중앙대·한신대 등에서 문예창작 강의를 해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신춘문예에 도전한 그는 14차례 최종심과 본선에 올랐다가 낙방했다. 그래서 2002년 응모 당시, 누구보다 절실했다. 등단 이후 지난 10년간 그는 시집 3권을 냈다. 강의 틈틈이 서평 등 외고를 썼다. 젊은 시인에 주목하는 문단도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강의 도중 그는 등단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당선 이후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을 전해준다.

밥벌이와 글쓰기를 병행하는 이들에게는 늘 아슬아슬한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김중일 시인이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건 대학 3학년 때였다. 공대생이던 그는 등단 후 문학 공부를 하려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2006년부터 문화예술 공공기관 쪽 일을 했다. 직장 생활 틈틈이 반차·연차 등 휴가를 써가며 강연을 하거나 글을 썼다. 시 쓸 틈도 없이 업무가 늘자, 2009년 일을 그만두었다. 현재는 경기도 동탄에 있는 홍사용문학관에서 근무한다. 전 직장보다 작품 활동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가 수월하다. 그는 동인 ‘불편’의 멤버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 등단한 작가들의 교류가 작품생활을 지속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58~59쪽 딸린 기사 참조).

〈문화일보〉로 등단한 윤성학 시인은 사회생활이 시 쓰기에 영감을 준다고 말한다. 따로 시간을 내 쓰기보다 전철에서, 혹은 운전석에서 메모를 한다. 시의 소재를 현대인의 일상에서 얻기 때문에 윤씨의 삶 자체가 토양이 된다. 물론 막연한 두려움은 있다. 문단에서 잊히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다. 직장 생활 15년차인 그는 데뷔 당시에도 일을 했다. 10년 전보다 직급이 올라가고 업무량만큼 책임도 늘었다. 시를 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온전히 시인으로 사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전업 작가는 어떨까. 전업 작가는 김이은·정이현·박선희 3명이다. 2명은 전업 작가인 동시에 주부다. 모두 소설가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정이현은 스스로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여성의 연애를 다룬 등단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원작 판권이 영화사에 팔리면서 등단 첫해부터 먹고살 걱정을 덜었다. 한 달에 한 번, 단편소설 청탁이 들어왔다. 편당 고료는 70만~100만원. 그간 소설집 2권과 장편소설 2권을 냈다. 인세만으로 생활할 수 있었던 자신은 운이 좋고, 매우 드문 경우라고 설명했다. 소설가를 ‘짬밥이 안 쌓이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라고 소개한 그는 언제나 0에서 시작하는 글쓰기에 대한 부담도 털어놓았다. 예술하는 이의 어려움이다.

소설가 김이은은 10년차라는 숫자의 무게를 전했다. 소설 2권을 포함해 5권이나 책을 냈지만 언제나 흐릿하고 안갯속을 걷는 느낌이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지만 여전히 변두리에 있다는 자괴감 때문에 내부의 늪이 깊고 넓어졌다. 이제 문단의 아이 티를 벗고 본인의 문학 세계를 확장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김씨를 짓눌렀다. 문학이 이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근본적인 고민은 별개로 그를 따라다닌다.

이는 김씨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문인은 등단 이후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지만 단행본을 내지 못했다. 그 이유를 문단 내 소외로 해석했다. 문단 트렌드가 어린 층을 선호하면서 주로 ‘미숙성한’ 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등단한 작가들 중 뒤늦게 데뷔한 편인 그는 습작 원고를 문학 전문지에 투고해봤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평단의 평가에서 멀어진 경우다. 


“등단은 특권인 동시에 천형”

41세에 창비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이상섭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이제 50줄에 들어선 그에게 등단은 축복이자 고통이었다. 시대 현실에 맞춰 작품 세계를 바꾸는 게 힘들었다. 군사독재 시절 대학에 다녔다. 하지만 데뷔와 동시에 운동권 소재는 후일담 문학으로 분류돼, 낡은 게 되어버렸다. 문단과 스킨십을 하고 싶지만 부산에 살아 여의치 않은 것도 아쉬웠다.

2012년 한국작가회의에 속한 회원은 1809명이다. 전국 지부까지 합하면 2500명이다. 매년 90~120명이 입회 원서를 낸다. 2012년 〈경향신문〉 평론 부문에 당선된 이강진씨(23)는 “등단만 보고 왔는데 막상 올라서니, 출발점밖에 안 되더라. 그 간극이 좀 충격이긴 하다”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걸로 먹고산다는 게 특권인 동시에 천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길을 결심하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은 갓 등단한 이도 모르지 않는다.

이번 조사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소설가 김애란도 신춘문예 당선 전,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데뷔했다. 지난해 〈두근두근 내 인생〉을 펴낸 그는 장편을 준비하며 ‘매일 쓰는’ 몸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등단의 경험이 있는 누구나 ‘매일 쓰는’ 일상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데뷔 10년차 작가 대부분 ‘어쩌다 쓰는’ 몸이었다. 그래도 끝내 문학을 포기한 이는 드물었다.

취재 도움:배정훈·박소영·이동권 인턴 기자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