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과장이긴 하지만, 김정일의 죽음과 새로 등극한 김정은에 대한 관심이 한 주를 견디지 못하고 ‘톱뉴스’에서 사라진 현상이야말로 분단 체제의 항구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은 남과 북이 그만큼 ‘위험사회’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방증이자, 북한이 외부에서 보는 것과 달리 상당히 높은 체제 안정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북한 문학 전공자인 B. R. 마이어스가 쓴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시그마북스 펴냄, 2011년)는 북한의 텔레비전 뉴스와 드라마·영화·만화·신문·잡지·문학작품·교과서·벽보·유화·기념물·사진 같은 다양한 선동선전 자료 분석을 통해, 많은 전문가가 오해하고 있는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실체에 접근하고자 한다. 지은이는 북쪽 국경이 허술해졌는데도 북한 주민들이 오로지 경제적 이유에서만 탈북을 감행할 뿐, 북한 체제에 대한 믿음과 사랑만은 버리지 않는 이유를 북한 체제의 성공적인 이데올로기 작업에서 찾는다. 여기서 그가 뜻하는 이데올로기란, 조직된 공동체의 주요 활동들을 지배하고 선택 및 결정의 기준을 제공하는 개념적인 준거틀이다.

북한 전문가들이 북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크게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북한을 ‘주체의 나라’로 보는 것이다. 북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주체사상일 것이라고 오도하게 되면, 북한 체제의 주요 행동 방식이 변형된 마르크스 사상의 일종이거나, 김일성이 구상한 인본주의적 국가주의일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북한 외부의 사람들이 북한의 실질적인 이데올로기를 바로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대외용 속임수일 뿐, 북한을 유지하는 준거틀이 아니다.

 

ⓒ이지영 그림

 


북한, 주체사상 교육 제대로 안 해

김일성이 창시하고 김정일의 지도로 완성된 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원리 아래, 인간의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강조한다. 전미영의 〈김일성의 말, 그 대중 설득의 전략〉(책세상 펴냄, 2001년)을 보면, 특히 자주성이 강조되는바 “‘자주성’은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이며 사회적 존재인 사람에게서 자주성은 생명 바로 그 자체다”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B. R. 마이어스는 주체사상을 국내에서 강조하면 할수록 북한 정권은 외국에 손을 벌려야만 하는 스스로의 모순을 북한 주민에게 납득시키기 어렵게 된다고 지적한다.

북한 정권이 주체사상을 통치 원리로 삼지 않을뿐더러, 인민에게 교육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더욱더 본질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약점 때문이다. “‘대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주체의 중심 개념이, 지도자의 보살핌이 필요한 취약한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어버이 수령을 찬양하는 개인 우상화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짓궂게도, 북한에서 안내원을 난처하게 하는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주체사상을 설명해달라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다수 북한 연구자들은 북한의 통치 원리로 최종적으로는 수령절대주의에 낙착하고 만 주체사상을 빼먹지 않으면서, 일제에 저항했던 강한 민족주의 유산과 가부장적 유교주의 잔재를 덧붙인다. 하지만 지은이는 열거된 세 원리(①주체사상 ②민족주의 ③유교주의)를 모두 배제하면서, 북한 정권의 유일한 통치 원리로 인종주의를 내세운다. 민족주의가 문화적 구성물인 반면, 인종주의는 생물학적 상상물이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인종주의를 물려받은 북한은 ‘극단적 민족주의(Ultra-nationalism)’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스탈린 시대의 소련보다는 나치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닮았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제국주의가 ‘강한 일본인(=신의 자손)’을 내세운 것과 달리 북한의 인종주의는 ‘순박한 조선인’을 내세운다. 바로 이 이데올로기야말로 ‘무력하지만, 선한 조선’과 ‘강하지만, 악한 외세’라는 멜로 드라마적 대립각 속에서, 북한 주민으로 하여금 절대적 궁핍을 인내하게 만드는 힘이다. 다시 말해 조선인은 대대로 평화를 사랑하는 순박한 인종인 데 반해, 조선 바깥의 세계는 온통 승냥이 천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미국이 남한보다는 잘살지만, 도덕적으로는 우리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한시도 지우지 못하는 남한 역시,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꼬집는다.


김일성은 어버이, 김정일은 어머니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B. R. 마이어스 지음시그마북스 펴냄

 

더욱 재미난 것은 북한의 선전기구가 김일성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아우르는 ‘어버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이런 호칭은 스탈린을 비롯한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자들이 자신을 가부장적 이미지로 꾸민 사실과 엄청난 차이가 나는데, 김일성을 승계한 김정일은 어버이가 아니라, 아예 ‘어머니’로 지칭되었다. 지은이가 ③을 배제한 까닭은 이 때문인데, 북한의 선전기구는 친부 살해의 대상인 아버지를 제거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에게서 반항의 목표를 지워버렸다. 이런 상징 조작이 “북한 정권이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내 생각을 보태자면,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울 때, 아버지는 군말 없이 쌀을 구해와서 가족 앞에 던져야 한다. 그게 아버지다. 하지만 북한에서 기근이 가장 심했던 1995~1997년에, 약 100만명이 아사하는 것을 지켜본 김정일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어머니란 배가 고파 우는 아이를 토닥이며 ‘얘야, 조금만 더 참아봐’라고 말해도, 아버지만큼 비난당하지는 않는다. 어머니라는 호칭은 기막힌 선택이었다.

선우현의 〈우리 시대의 북한철학〉(책세상 펴냄, 2000년)에 따르면, 주체사상의 시발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리 보충하겠다는 나름의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자 자주적 존재인 인간은 혁명 주체의 지도자인 수령과 반드시 연계되어야만 그 의미를 유지할 수 있다”라는 수령절대주의로 나갔다. 이와 달리 B. R. 마이어스는 김일성가(家) 3대 세습의 비밀을 북한식 인종주의의 멜로 드라마적 결말에서 찾았다. 즉 북한 정권은 북한 주민으로 하여금 “조선인들은 혈통이 지극히 순수하고, 따라서 매우 고결하기 때문에 어버이 같은 위대한 영도자 없이는 이 사악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라고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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