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조카 두 명이 동시에 수능을 치렀다. 한 명은 서울에, 한 명은 지방에 산다. 그로 인해 대학별 입시 커트라인을 관심 갖고 보다 깜짝 놀랐다. 지방 국립대 커트라인이 서울에서 입학점수가 가장 떨어지는 축에 속한다는 몇몇 대학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낮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지방 국립대는 공부 잘하지만 집안 형편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서울의 웬만한 중상위권 대학과 입학점수가 막상막하였다.

이러니 지역에 미래가 없다고 아우성치지. 인재도, 돈도, 문화도 블랙홀처럼 서울이 빨아들인 지 오래. 이 구조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이제는 ‘서울 공화국’이라는 말조차 꺼내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하긴 비판도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있을 때 가능한 것. 불평등 구조가 깊어지면 지배와 굴종의 관계만이 남게 된다. 


이게 어디 중앙과 지방만의 일일까.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영세상인, 뉴타운 투기꾼과 쫓겨나는 원주민 사이에도 관계의 균형추는 심하게 기울어만 간다. 노조 조직률이 지난해 처음으로 10% 이하로 떨어졌다는 소식은 상징적이다. 열심히 일하면 나도 잘살 수 있을 거라던, 눈앞에 보이는 사다리를 오를 수 있을 거라던 기대가 무너지면서 급기야는 자신의 계급적 보호막도 내던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든 이는 과연 누구일까. 사다리를 오를 의지와 기력을 잃은 나약한 자신일까, 아니면 일찌감치 높은 데 올라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저 위의 존재들일까.

장하준 교수는 갖가지 보호 장벽으로 부를 축적한 미국·유럽 국가들이 자신들을 뒤쫓는 개발도상국가들에 보호 장벽의 해제를 강요하는 위선적 행태를 보이는 것을 ‘사다리 걷어차기’라며 신랄히 비판한 바 있다. 지금 우리 눈앞에도 사다리 하나가 놓여 있다. 한·미 FTA, 그리고 TPP라는 이름의 사다리가 그것이다. 누구는 그 사다리에 제대로 매달리기도 전에 호된 꼴을 당할 것이라 하고, 누구는 지금이라도 얼른 사다리에 편승하는 것이 통상국가인 우리가 살 유일한 길이라 하기도 한다.

한·미 FTA를 다룬 커버스토리에서부터 미국의 환태평양 군사 전략, 유럽발 경제위기, 멕시코 난민 사태에 이르기까지, 이번 호에 다룬 기사들을 읽다 보면 독자 여러분도 사다리에 오를 것이냐, 말 것이냐 선택을 강요하며 숨 가쁘게 굴러가는 국제 정세에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 사다리에 오르려다 내부의 약자들을 영영 걷어찰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물대포보다 사납게 2011년 겨울을 파고든다.

기자명 김은남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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