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농협 전산망이 마비됐다. 우리나라 금융 역사상 최악의 금융 전산 사고였다. 사건 당시 금융 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농협 전산망의 카드 거래 기록 원본은 물론 백업본까지 함께 날아갔다”라고 말했다. 5월3일 검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번 사건은 북한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사이버 테러다.”

하지만 내부자에 의한 사이버 테러였을 가능성이 수그러든 것은 아니다. 접속 기록이 반복적으로 삭제된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특정 기간에 고객의 거래 내역이 기록된 시스템 파일을 삭제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사상 초유의 금융사고 당시 농협중앙회는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기관 경고를 받았다. IT본부장 등 20여 명도 중징계를 당했다. 그러나 정작 사령탑인 최원병 농협중앙회장(65)은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다. 기자회견에서 최 회장은 “(나는) 비상임이어서 책임질 일이 없다. 나도 (직원들이 정보를 안 줘서) 기자들처럼 당했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청와대제공최원병 농협중앙회장(왼쪽 첫번째)과 이명박 대통령(왼쪽 두번째)이 9월6일 ‘전국 농업인 한마음 전진대회’에 참석해 우리 농산물을 구입하고 있다.

 


횡령·공금 유용·뇌물 등 금융사고 판쳐

농협중앙회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자산 230조원, 자회사 25개를 거느린 공룡 조직이다. 중앙회 산하 지역조합이 1178개, 중앙회 임직원은 1만8000명이다. 조합원은 240만명에 이른다. 1년 예산만 3조7794억원 수준이다. 중앙회장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비상근이지만 거의 매일 농협중앙회 본점에 출근해 주요 업무 보고를 받는다. 농협 회장은 1만8000명에 이르는 농협 직원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 농협중앙회에는 1억원 이상 연봉을 받는 직원이 600명 넘고, 회원조합의 경우도 억대 연봉자가 3000명 넘는다. 최 회장의 연봉은 7억원이 넘는다.

야당 국회의원조차 벌벌 떨 정도다. 국감에서 농협 문제를 제기했던 민주당 ㄱ의원에게 기자는 수차례 자료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ㄱ의원은 간단한 자료를 공개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ㄱ의원 측은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아 자료를 줄 수 없다. 농협 눈 밖에 나면 선거에서 어려워진다”라고 말했다.

‘공룡’ 농협이 선거 열기에 휩싸여 있다. 2007년 12월 취임한 최원병 회장은 11월18일 치를 제5대 농협중앙회 회장 선거에서 연임을 노린다. 이번 선거는 농협중앙회장 선거 최초로 간선제로 치러진다. 2009년 2월 농업협동조합법이 개정되면서 전국 조합장(1178명)이 모두 모여 투표하던 직선제에서 간선 4년 단임제로 중앙회장 선출 방식이 변경됐기 때문이다. 회장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대의원은 전국 1178명 조합장 가운데 288명이다.

문제는 그의 연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이광석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농협이 한·미 FTA, 농협법 개정 등 현안에 대해 구체적 입장을 표명하는 일 없이 정치적 행보만을 보여왔다”라고 말했다. 2010년 식량자급률은 26.7%, 농업 인구는 313만명으로 한국 농업의 기초 체력은 매우 허약하다. 그런데도 최 회장 임기 4년 동안 농업 회생을 위한 자구책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의장은 나아가 한·미 FTA 협정이 한국의 농·축산업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데도 농업중앙회나 최원병 회장이나 한·미 FTA 등에 아무런 의견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허권 금융노조 농협중앙회지부 위원장은 “얼마 안되는 농협 임원이 400만 농민을 대변하지는 못한 채 못살게만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횡령·공금 유용·대출금 편취·뇌물 등 농협의 금융사고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11월1일 과천농협 조합장 등이 대출 금리를 인상해 47억여 원에 이르는 부당이득을 챙겼다가 구속됐다. 10월에는 경남 산청농협 하나로마트 점장이 고깃값을 빼돌렸다가 구속됐다.  6월에는 경남 남해 군내 지역농협 수납 담당자가 4억3000여 만원을 횡령해 구속됐다. 같은 달 시공업체에 8억원 규모의 공사를 주는 대가로 뇌물 1억원을 받은 충남 금산 지역농협 조합장도 구속됐다. 올해 초에는 17억원어치 쌀을 빼돌린 전남 보성 지역농협 직원이 구속됐다. 지난해 5월에도 경남 창원의 단위농협에서 170억원의 대출을 알선한 뒤 6억원을 받은 혐의로 한 간부가 구속됐다.

 

 

 

 

 

 

ⓒ시사IN 조남진10월31일 농협중앙회 앞에서 최원병 회장의 농협 회장 선거 출마 등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농협 간부나 직원이 구속되는 일은 이제 별다른 뉴스도 아니다. 농협은 1~3대 민선 회장인 한호선·원철희·정대근 씨가 모두 감옥살이를 한 진기록을 갖고 있다. 최 회장 취임 이후로도 농협의 내부 감사 시스템은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최 회장은 표 관리를 위한 선심성 행보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지난 9월6일 농협은 ‘전국농업인 한마음전진대회’를 열었다. 하루 행사를 위해 농협은 33억원을 사용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명박 대통령도 참석했다. 선거를 앞두고 대의원들의 외유도 부쩍 늘었다. 올해는 40여 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60여 차례 해외 연수를 실시했다. 지난해보다 두 배 늘어난 수치다. 연수 비용은 농협에서 전적으로 부담한다. 지난 4월 사상 초유의 농협 전산망 사고로 다시 구설에 올랐을 때에도 외유를 멈추지 않았다. 5월18~28일에는 농협 임직원 17명이 9박11일 일정으로 미국·캐나다 연수를 다녀왔다. 이 중 중앙회장 투표권을 가진 대의원이 8명이었다.


최원병 회장 아들 농협에 특별 채용

농협 회장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농협중앙회 자회사 이사 가운데 대의원을 겸직하는 비율도 2007년 12월 34.7%에서 올해 5월에는 59.5%로 크게 늘었다. 투표권을 가진 이들 대의원에게 농협 자금이 집중 지원된 것도 석연치 않다. 농협중앙회는 농촌 사업 활성화와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매년 무이자로 조합에 자금을 지원한다. 2008~2011년 3년간 전국 1167개 조합에 지원된 무이자 자금은 총 22조9558억원이다. 매년 7조원 이상이 투입됐다.

문제는 형평성이다. 조합 하나가 1년에 받는 평균 지원자금은 약 50억6000만원. 그러나 농협중앙회 대의원이 장으로 있는 조합 288곳은 연간 평균 62억3000만원, 이사가 조합장인 곳은 72억3000만원을 지원받았다.

올해 들어 중앙회 대의원·이사가 있는 조합과 전국 평균 간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올해 8월까지 전국 조합에 지원된 금액은 약 2조3000억원. 전국 평균 조합당 19억6000만원을 지원받았지만, 중앙회 대의원이 있는 조합은 25억2000만원, 이사가 있는 조합은 34억원을 지원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원병 회장이 조합장을 지낸 경주 안강농협에는 지난 3년간 전국 평균 9배가 넘는 472억원이 지원되었다.

농협 고위직 자제를 특별 채용한 것도 연임을 위해 선심을 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농협중앙회가 2011년 국정감사에 제출한 ‘현직 조합장 및 상임이사 자녀의 채용 현황’을 보면 조합장 및 상임이사 자녀 총 116명이 농협 조합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중 2008년 이후 신규 채용된 인원이 42명이다.

최원병 회장의 3남 재혁씨(31)도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최재혁씨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2008년 3월 농협대학에 입학했다. 농협대학은 졸업생 취업률 100%로 널리 알려진 전문대학이다. 최재혁씨는 수능을 치르지 않고 ‘전문대졸 이상자 특별전형’으로 입학했다. 조합 추천이 없으면 지원이 아예 불가능한 정원 외 전형이다. 하지만 최재혁씨는 아버지가 한때 조합장으로 있던 경북 안강조합에서 추천서를 받았다. 최원병 회장은 2009년 9월 농협학원 이사장에 올랐다.

 

 

 

 

 

 

 

ⓒ시사IN 조남진농협중앙회(위)는 자산 230조원, 자회사 25개를 거느린 공룡 조직이다.

 

 

2010년 3월에는 경북 경주 안강농협에 입사했다. 이때도 공개 경쟁을 치르지 않고 ‘전형 채용’으로 들어갔다. 최재혁씨는 현재 안강농협 산대지점에서 주임으로 근무 중이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안강농협의 인사위원회 의결을 거쳐 서류 심사 후 면접에 의해 채용되었기 때문에 선발 과정에 문제가 없다”라고 말했다.

최 회장에 대한 안팎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다. 11월4일 농협 노조는 성명서를 내고 최원병 회장의 연임 시도를 공개 반대했다. 한 농협 조합장은 “‘농협중앙회장은 만석꾼, 조합장은 천석꾼, 농민은 빈털터리’라는 말이 있다. 최 회장은 농민은 뒷전인 농협 운영에 대한 반성을 먼저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 회장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신망은 두텁다. 최원병 회장은 1946년 경북 경주 출신으로 2007년 12월 이명박 바람을 타고 제4대 농협중앙회장에 취임했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포항 동지상고 동문으로 최 회장이 4년 후배다. 최 회장은 지난 4월 청와대에서 열린 포항 동지상고 동문회에 참석해 인연을 과시했다. 동문 모임은 이명박 대통령 주최로 진행됐으며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도 함께했다.

2008년 12월 농협은 우리은행을 따돌리고 청와대 입점 은행으로 확정됐다. 지난 5월 이 대통령의 아들 시형씨가 내곡동 땅을 사들였는데, 6월15일 이씨는 김윤옥 여사가 소유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저 앞마당을 담보로 농협중앙회 청와대지점에서 7억2000만원을 대출받았다. 농협은 김윤옥 여사가 주도하는 한식의 세계화를 위한 한식재단에 거액을 출연하기도 했다.

지난 9월6일 최 회장은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기자명 주진우·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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