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잡이는 변기수였다. 특유의 속사포 입담을 날렸다. “녹화장 찾기 힘드셨죠. KBS·MBC는 찾기 쉬운데 여기는 구석에 짱박혀 있어 가지고, 저도 처음 올 때 한참 헤맸잖아요.” “많이들 오셨네. 뒤에 계신 분들은 자리가 불편하시죠? (일제히 “네”) 억울하면 일찍 오든가.” ‘남의 얼을 빼는’ 사람이 바람잡이다. 녹화 시작 전, 분위기를 띄우는 그는 KBS 〈개그콘서트〉(개콘)에서도 같은 역할을 했다. 이수근도 방송 전 바람잡이로 시작해 코너를 맡았다. 둘 다 지금은 친정인 개콘을 떠났다.

10월11일, tvN의 〈코미디 빅리그〉(코빅) 다섯 번째 녹화가 있는 날이었다. 서울 상암동 CJ E&M 녹화장에는 400여 석이 모자랄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9월부터 방영 중인 코빅은 개콘 초창기부터 10년간 개콘을 연출한 김석현 PD와 장덕균 작가가 CJ E&M으로 둥지를 옮긴 뒤 처음 만든 프로그램이다. 장기였던 공개 코미디 방식을 그대로 가져왔다. 지상파 3사의 스타급 개그맨이 합류했다. 옹달샘(유상무·유세윤·장동민), 갈갈스(박준형·정종철·오지헌·윤석주), 아메리카노(김미려·안영미·정주리), 4G(박휘순·윤성호·양세형·김기욱) 등 11개 팀으로 구성된다. 〈화성인 바이러스〉 〈현장 토크쇼 택시〉 등으로 입지를 굳힌 tvN의 5주년 야심작이기도 하다.

코빅은 개그계의 ‘나가수’로 소개되기도 했다. 리그제를 도입해 11개 팀이 10회 동안 경연을 벌여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팀이 시즌 마지막회에 상금 1억원을 탄다. 누리꾼 투표 2, 3위는 각각 5000만원, 2000만원을 받는다. 반면, 청중 평가단 투표 결과, 매회 하위 4개 그룹은 재방송에서 편집된다. CJ미디어가 보유한 채널만 16개다. tvN에서 제작하더라도 창구가 15개다. 재방송이 생명인 케이블계에서나 가능한 ‘가혹한’ 아이디어인 셈이다. 


ⓒCJ E&M 제공코빅의 코너인 ‘개통령’ .

오후 7시30분. 지미집 카메라가 진행자 이수근·이영아가 선 무대와 가까워지며 녹화가 시작됐다. 방송 직전 이수근은 “첫 주에는 30명만 있어서 경비 아저씨가 지나가는 분들 데려다 앉히고 그랬다”라며 만석인 관객석을 훑었다. “이런 프로그램이 잘되어야 전체 코미디가 산다. 그래서 나도 옮겨온 거다.” 말장난으로 관객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변기수도 “놀고 있는 개그맨들이 설 무대가 많아져야 합니다”라며, 이건 농담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은 지상파에서 개콘만 살아남았다. 김병만은 연말 시상식에서 3개 방송사 사장에게 코미디에 투자 좀 해달라고 소감을 말했다. 지난해 MBC 개그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박준형은 코빅 1회에 첫 번째로 출연하며 “지상파 개그 프로라고 달랑 하나 남았다. tvN 개그가 화수분이 되어 사람들 마음 속에 닿을 수 있도록”이란 대사를 넣기도 했다.

1시즌 10회의 절반까지 왔다. 제작진은 계절마다 한 시즌을 계획하고 있다. 첫 회 2.48%에서 1.67%(2회), 1.77%(3회) 등 1% 후반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케이블에서는 1%를 기점으로 흥행 여부를 판단한다. 하지만 제작진의 기대에는 못 미친다. 김석현 PD는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그에게도 1년의 공백이 있었다. 일부 개그맨도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자존심을 걸어야 하는 리그 방식이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현장은 웃음의 열기가 뜨거우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녹화하는 2시간, 맘 편히 웃는 건 관객뿐이었다. 연기자들은 비장했다. 7분여 개그가 끝난 뒤 다음 녹화까지 짬이 난 틈에 “투표해달라” “3분을 위해 7시간을 분장했다. 잘봐달라” “순위권에 들면 이대로 홍대에 가서 춤을 추겠다”라며 애걸복걸했다. 관객들에게 절박함이 전해졌다. 순위권 선정에는 경력이 아무런 변수가 되지 못한다. 고참들로 구성된 갈갈스도 하위권 그룹으로 선정돼 얼굴에 밀가루를 맞았다. 김석현 PD는 “개그에서만은 자존심이 센 친구들이라 앞에서는 웃지만, ‘나가수’에 나오는 가수들만큼 긴장감이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국주는 원형 탈모가 생길 정도라고 한다.


ⓒCJ E&M 제공코빅의 코너인 ‘갈갈스’.

요즘 유행하는 경쟁 방식의 도입은 일종의 흥행 장치다. 예상을 뒤엎은 팀이 선전할 때의 드라마도 노릴 수 있다. 인지도는 떨어져도 콘텐츠가 좋아 상승세인 팀도 있다. 기존 코미디 프로그램도 경쟁을 통해 무대에 서지만, 직접 청중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김 PD는 최근 SNS 미투데이에 “개콘 연출하는 동안 가장 힘든 일은 아이디어 짜는 것도, 녹화·편집하는 일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매주 잘라내야만 하는 구조, 그 일이 가장 힘들었다. 나를 친형처럼 의지했던 녀석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던. 그런데 그건 등수 매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팔자, 더럽나 멋지나?”라며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지상파 3사 출신이라는 ‘영광과 한계’

녹화 내내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연기자들을 따라다닌 건 지상파 3사 출신이라는 꼬리표였다. 영광의 흔적이지만 식상한 면도 없지 않았다. 갈갈스는 역시 ‘못난 캐릭터’를 소재로 다뤘다. 이런 식이다. “한강 르네상스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오세훈 시장이 오씨라서(오지헌이 오씨다). 스티브 잡스가 죽은 이유는? 정종철이 아이폰을 써서.” 한현민의 “희한하네” 따위 잘나가던 시절 유행어가 잠깐씩 언급됐다. 〈웃찾사〉와 개콘, MBC 〈하땅사〉가 가끔씩 떠올랐다.

코빅의 간판은 ‘옹달샘’이다. 그들이 등장할 때부터 박수 소리가 커졌다. 1회부터 3회까지 연속 1위를 하다 4회에 2위로 물러났다. 하지만 관객의 기대는 여전했다. ‘기막힌 서커스’란 코너 제목으로 조련사 유상무의 진행 아래 유세윤과 장동민이 각기 동물 분장을 하고 나와 싸우는 콘셉트다. ‘놀래미’ 흉내로 지난주 좋은 반응을 얻은 장동민은 이번에 사마귀로 분했다. 유세윤은 ‘어둠의 제왕’ 도둑고양이였다. 이번에는 ‘사랑 이야기’였다. 스킨십을 하려고 할 때마다 사마귀의 뾰족한 손이 고양이를 계속 찔렀다. 신들린 사마귀 연기에 관객들이 낄낄댔다. 

옹달샘이나 안영미·정주리·박휘순 등 예능 프로그램에서 잘나가는 코미디언이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돌아온 건 어쩔 수 없는 ‘개그 본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PD에 대한 신뢰도 컸다. 유상무는 “김석현 PD와 친분이 두텁다. 우리 세 명을 만들어주다시피 한 분이다. 신인 시절 우리 개그를 쓸 수 있게 해주었다. 프로가 잘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라고 말했다.

개콘 출신 한 개그맨은 지상파보다 유연한 분위기를 장점으로 꼽기도 했다. “개콘은 일주일에 다섯 번은 나가야 했다. 연습을 하든, 회의를 하든 무조건 나오게 했다. 그런다고 아이디어가 더 생기는 건 아닌데, 여기는 조율이 가능하다.” 스케줄 조정이 좀 더 여유로운 셈이다.

공개 코미디의 매력은, 현장이 훨씬 재미있다는 점이다. 화면을 대하던 것보다 웃음에 관대해졌다. 연기자의 장단점도 명확히 눈에 들어왔다. 연기력, 순발력, 스토리텔링 능력 등 각자의 강점이 달랐다. 비교적 심의가 느슨한 케이블 방송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수위 높은 농담도 기대했지만 안영미가 잠시 담배를 손에 쥐었던 것 말고는 없었다. 

“내가 하나도 안 웃긴다는 걸 알았다”

기자가 참관한 주 특히 선전한 팀은 ‘꽃등심’ 팀이었다. 전환규와 이국주. 두 사람은 MBC 공채 출신이다. 육중한 이국주의 몸매가 주된 개그 소재다. 건강하려고 찬 건강팔찌와 건강목걸이가 조여서 오히려 불편하다는 불평과 패션 허리띠가 앉으면 살에 묻혀 안 보인다는 투덜거림이다. 이번에는 통했다. 관객의 박장대소에 두 사람의 낯빛이 밝아졌다. 

두 사람은 코빅에 출연하면서 MBC에서 하차했다. MBC에도 개그 프로그램이 있지만 지속될지 불안했다. 공개 코미디가 하고 싶었고, 고만고만한 우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전환규는 “나는 내가 웃기는 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하나도 안 웃긴다는 걸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쟁쟁한 선후배가 모인 자리다.

11번째 마지막 코너, 관객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관객 모욕의 ‘아3인’(이상준·예재형·문규박)의 차례였다. 갑자기 관객 한 명이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상황이 어수선해졌지만, 이상준은 “너, 옹달샘에서 심은 애지?”라며 재치 있게 넘겼다. 순위 발표는 청중이 모두 나간 뒤 따로 모여서 한다. 녹화가 끝난 늦은 밤, 변기수와 ‘아3인’이 녹화장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축제 분위기예요. 골고루 재밌었거든요.” 예전보다 팀 간 격차가 줄었다는 자평이다. 기자의 질문에는 발랄하게 답했지만 발표를 듣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이들의 뒷모습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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