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자진모리 장단에 따갈로어 구호가 들렸다. “우링 망가 가와, 후봉 마파 가라야(working class, liberating class)” 눈이 마주치면 먼저 인사하고 미소 짓던 필리핀 사람들의 눈빛과 목소리가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후끈한 공기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트럭 짐칸에 앉은 필리핀 사람 7명은 돌아가며 구호를 외치고 연설을 했다. 7월3일 오전, 마닐라에서 수빅으로 가는 ‘필리핀 판 희망버스’ 안 풍경이었다.

1호차 트럭을 뒤로 지프니(짚차를 개조한 필리핀의 미니 버스), 40인승 버스, 승용차 등 20대가 일렬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caravan protest(이동차 시위)’라 불리는 필리핀 판 희망버스는 필리핀에서 흔한 시위 방식 중 하나다. 차종은 다양했지만 붙인 메시지는 똑같았다. ‘Justice for HANJIN workers(한진 노동자를 위한 정의).’ 필리핀 수빅 한진중공업 노동자회 SAMAHAN, 노동단체 MAKABAYAN, BWI 등 10개가 넘는 사회·시민단체의 깃발이 펄럭였다. 

ⓒ시사IN 조남진

수빅 한진중공업의 노동실태를 규탄하기 위해 110km 거리를 3시간 동안 가는 여정이었다. 한진의 직접 고용과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수빅 한진 노조는 회사의 장시간 노동으로 지난 2007년부터 지금까지 사망자가 31명이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측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진건설에서 사망자가 12명이었고, 한진 조선소가 들어선 후에는 8명이 사고로 사망했다. 그 외 자살, 심장마비 등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4명이다. 합치면 총 24명이다. 31명은 어떻게 나온 수인지 모르겠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가는 길 중간 각 지역에서 합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팜팡가에서 50여명, 수빅 조선소가 있는 올랑가포에서 100명 정도가 함께해 이동차 시위대는 300명 가까이 늘었다. 지역 언론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지역 라디오 기자 마돈나 비로라씨는 “한진 이슈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닐라에서부터 트럭을 타고 온 수빅 한진조선소 해고노동자 조이 곤잘레스(28)씨는 “한국 관리자가 ‘시바로마’ ‘새키야’ ‘팔리팔리’라고 하면서 발로 차고 때렸다”라고 말했다.  

오후 2시, 수빅 조선소로 가는 길이 막혔다. 경찰 15명이 이차선 도로에 일렬로 늘어섰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항의를 했다. 한 집회 참가자는 “길을 지나가는 게 불법도 아닌데 몽둥이까지 들고 경찰이 길을 막는 이유를 모르겠다. 필리핀 경찰이 필리핀 사람이 아니라 한진을 보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길을 막은 경찰과 지나가려는 시위대 간에 10분 정도 몸싸움이 있었고, 중간에 스콜이 쏟아져 대치하던 시위대가 잠시 비를 피했다. 

이날 집회에는 필리핀 주교회의 사회행동정의평화사무국 위원장인 파비요 주교도 참여했다. 1시간가량의 대치 끝에 파비요 주교는 그 자리에서 거리 미사를 진행했다. 집회에 참가한 테레시타 보고노스 BWI(건설목공연맹) 활동가는 “87%가 가톨릭인 필리핀에서 주교가 나섰다는 건 큰 의미다. 필리핀에서는 대통령도 주교  말을 들어야 한다. 한진도 가톨릭이 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 유념해야한다”라고 말했다. 

미사는 한국에서 온 한진 영도조선소 해고노동자 김경춘씨(49)씨의 발언으로 시작됐다. 김씨는 “한국 한진에서도 한진은 노동자를 탄압하고 있다. 사측이 노동자를 대량해고를 했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 지도위원이 190일 넘게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다. 국회 청문회 참석도 거부하는 한진을 함께 규탄하자”라고 말했다. 파비요 주교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위한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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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겨 SAMAHAN(한진중공업 노동자회) 사무실 앞에서 마무리 집회를 열었다. 한진 필리핀 노동자들은 파비요 주교 곁에 모여 하소연을 했다. 아베조 제네퍼(24)씨는 한국인 관리자가 던진 가위에 맞아 상처가 났다며 다리를 보여주었다. 옆에 있던 폴 피안탄(40)씨도 배를 내밀고 티셔츠를 위로 올렸다. 지난해 작업장에서 떨어져 찢어진 자국이었다. 이들은 한진이 산업안전에 제대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택균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 대외협력팀장은 “규정에 맞춰 작업장 별로 안전 장비를 제공한다. 그러나 필리핀 노동자들이 외부에 팔거나 잊어버렸다며 매번 새것으로 달라고 한다. 또 안전장비를 잘 안 챙긴다. 회사의 안전장비제공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부주의나 관리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집회 마무리는 필리핀판 ‘촛불시위’였다. 이 또한 필리핀에서 흔한 시위방식이다. 6시30분께 어스름이 지자, 50cm 정도 되는 대나무 통이 등장했다. 시위대는 통 끝에 불을 붙이고 거리를 한 바퀴 돌며 구호를 외쳤다. ‘Dignity for HANJIN worker diginity for all(한진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는?

세계 2차 대전 이후부터 1992년까지 미군 해군기지로 사용되었다. 필리핀 정부가 특별 경제자유지역(SBFZ)으로 선포한 수빅에 한진이 진출한 건 2006년이다. 2년만에 조선소를 건설한 한진은 규모 70만평에 2만1천명이 근무하는 세계 4위의 조선소를 세웠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410명을 해고한 한진은 노조로부터 필리핀 수빅 조선소에 물량을 몰아주고 영도조선소를 정리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수빅조선소에서 산재사망 사고가 잇달아 발생하면서 지난 2009년 필리핀 하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다.

 

기자명 필리핀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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