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안에 섬이 생겼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사업장 안에 고립된 섬 하나가 남았다. 타워크레인 85호다. 50m 높이  크레인 위, 30여명의 한진중공업 노조원이 서로의 몸을 하나의 밧줄에 묶고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70도 기울기 계단에 앉은 이들 중 한명이 끌려 내려가면 모두 떨어지게 된다. 끌어내리려는 쪽과 버티는 쪽의 실갱이가 지속됐다. 그 5m 위엔 김진숙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이 188일째 농성 중이었다.  85호를 제외하곤 용역 300여명이 전 작업장을 접수했다.

6월27일 오후 1시경, 법원의 행정대집행을 바로 앞두고 한진중공업 사측과 노조는 합의서에 사인했다. 400여 명의 대량해고에 저항해 6개월 간 진행해온 파업을 철회하고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의미였다. 파업 철회와 업무복귀를 전제한 '노사협의이행합의서'의 내용은 크게 세가지다.  해고자 중 희망자에 한해 해고 이전 회사의 희망퇴직 처우 기준을 적용하기로 할 것,  민형사상 고소고발 진정 건은 취하하거나 최소화할 것, 김진숙 지도위원의 퇴거는 노조에서 책임질 것 등이었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복귀 결정의 배경을  장기투쟁으로 인한 생활고와  현실적인 어려움 등으로 설명했다. 채길용 지회장은 "해고자에 가려져 힘들어도 호소할 곳이 없었던 다수의 비해고자들이 파업대오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파업대오를 끝까지 지켜준 비해고자 조합원들에게는 한없이 감사한 마음과 아울러 더 이상의 피해를 줄 수 없다는 미안함이 교차한다"라고 밝혔다.  "이제 모든 조합원들의 아픔을 헤아려야 할 시기가 왔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업장 안팎의150여 명 노조원은 이에 반발했다. 천병호씨(48)는 며칠 전 개인적인 일로  잠시 작업장을 빠져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파업현장을 오가는 게 비교적 수월했던 분위기는 주말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그는 "지회장 단독으로 벌인 일이다. 합의된 사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결정에 대해서는 "상황이 불리하지 않았다. 조남호 회장이 출석하는 청문회도 앞두고 있었다"라며 아쉬움을 비쳤다. 6월29일 예정된 국회 청문회엔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이재용 한진중공업 대표이사가 출석하기로 예정됐다. 이날은 작업장 내 공권력 투입에 반대하기 위해 내려온 민주당 정동영 의원은 "국회의 능멸을 중지하라. 국회에서 한진중공업 사태의 엄중함에 모처럼 여야 만장일치로 조남호 회장이 참석하는 청문회를 열 예정이었다"라며 법원의 행정집행을 반대했다.

노사합의와 별개로 법원이 내린 퇴거명령 가처분 결정에 따른 행정대집행은 이뤄졌다. 크레인 밑을 사수하다 나온 한 노조원은  "노조 집행부가 합의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전하는 분위기에 따르면 전날인 6월26일 저녁, 한시 반에 행정집행이 이뤄진다는 소리에 내부가 어수선했다고  한다. 전체회의가 6시간동안 진행됐다. 집행부는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남은 노조원 일부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양 측간 갈등이 심했다"라고 그는 전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이 이탈하기도 했다. 한편 합의서의 효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조합원들도 있었다. 해고철회 효력이 발생하려면 상급단위인 금속노조 지부 대표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한진중공업지회 집행부 관계자는 "집행부의 판단에 대한 이견은 있을 수 있겠지만 합의서 이행에는 무리가 없다"라고 답했다. 

작업장 내 외부인의 출입은 철저히 차단됐다.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곳은 유일하게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 있는 곳은 한진중공업 사업장 건너편 신도브레뉴 아파트 단지였다. 가족과 지인들, 동료들이 아파트 계단에 앉아 상황을 지켜봤다. 오후 4시50분 경, 70도 기울기 철제 계단에서 벌어지는 몸싸움이 아슬아슬했다. 노란색 안전모를 쓴 용역이 계단에 올라가 밧줄을 칼로 끊었다.  가족과 지인은 오열하며 "올라가지마. 내려가라고!"라고 외쳤다. 

한편 외부 상황을 지켜봐온 김진숙 지도위원은 남은 조합원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비췄다. "우리는 살고 싶습니다. 조합원을 지키고 싶습니다. 가족과 처자식을 지키기 위해 오늘까지 싸워온 사람들입니다"35m 상공에서 얼굴을 드러낸 그의 말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가 있는 곳의 전기는 오후 6시를 기점으로 끊겼다. 85호 크레인 위, 34명 노동자와 김진숙 지도위원의 농성 189일째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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