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4년차에 접어들면서 차기 대선 후보의 발걸음도 서서히 빨라져간다. 역시 큰 선거가 다가와야 정치판에는 생기가 도는 법이다. 후보뿐만 아니라 지지자의 열기도 달아오른다. 평소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머지않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침을 튀길 날이 올 것이다. 술집에서 옆자리와 시비가 붙어 주먹 다짐을 하는 일도 벌어지리라.

요즘 정치팀 기자들은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의 지지자들 상대하기를 가장 꺼린다. 그들은 극성스럽기가 황우석씨나 조용기 여의도 순복음교회 목사 추종자 못지않다. 유 대표에 대해 요만한 소리라도 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정신 못 차리게 쏘아댄다. 개중에는 다짜고짜 육두문자를 날리는 ‘종결자’도 있다. 유 대표 본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지 싶은데도, 유 대표 지지자들은 쿨하기로 소문난 이숙이 〈시사IN〉 정치팀장의 화난 목소리가 온 편집국을 울리게 만들 정도로 집요하다.

비록 나중에는 그 사람을 찍은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배신감을 느낄지라도 사람들은 대선 때마다 특정 후보에 대한 확신에 목을 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목숨을 걸 정도의 신념이라도 그 뿌리를 캐보면 ‘증빙 자료’가 너무나 희박하다는 데 놀라게 된다. 우리의 신념과 직관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으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장막을 걷어내야만 진실과 대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책이 바로 〈보이지 않는 고릴라〉(김영사, 2011년)이다.


ⓒ한성원 그림

이 책의 저자는 12년 전 심리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험을 한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이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차브리스와 조교수인 사이먼스는 학생을 두 팀으로 나눠 이리저리 움직이며 농구공을 패스하게 하고, 이 장면을 찍어 짧은 동영상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실험 대상자에게 검은 셔츠 팀은 무시하고 흰 셔츠 팀의 패스 수만 세어달라고 부탁했다. 동영상 중간에는 고릴라 의상을 입은 여학생이 약 9초에 걸쳐 무대 중앙으로 걸어와 선수들 가운데에 멈춰 서서 카메라를 향해 가슴을 치고 나서 걸어 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험 대상의 절반은 패스 수를 세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 여학생을 보지 못했다. 뜻밖의 사실을 잘 보지 못하는 이 현상에는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란 이름이 붙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이 실험을 더욱 발전시킨 결과들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는 지능이나 성격과도 무관한 인간의 보편적인 약점이다. 그 때문에 결과가 뻔해 보이는 선거에도 후보가 10명 넘게 난립하는 것이다. 정치부 기자 시절 겨우 몇 백 표나 얻을까 말까 할 것으로 보이는 후보가 개표 전날까지도 자신만만해하는 걸 보면서 매번 신기해한 일이 있다. 결국 그 후보 눈에는 자기에게 불리한 점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증상이 심하면 다른 후보들이 담합했거나 외부 세력이 개입했다고 철석같이 믿어버리는 일도 일어난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을 찍은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BBK 동영상이 나왔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지음김영사 펴냄
현대 사회에 ‘눈 뜬 장님’ 느는 까닭

사람들이 ‘무주의 맹시’에 빠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들은 이것이 아마도 현대의 산물인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 신경계는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 시대의 속도와 규모에 맞춰져 있어서 착오가 생긴다는 것이다. 아이패드, 스마트폰, GPS를 사용하는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눈 뜬 장님이 될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

당신은 거울을 보면서 ‘나는 뭘 믿고 이렇게 잘생겼을까’ 혹은 ‘일처리가 어쩜 이렇게 깔끔할까’ 감탄해본 일이 있는가. 당신이 남자라면 아마 십중팔구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63%는 자기가 평균 이상으로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자는 무려 71%가 그렇게 믿는다(여자는 57%).

미국 남자들이 특별히 오만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다.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대다수가 평균 이상으로 자기가 현명하고 매력 있다고 여긴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을 포함해 상당수 세상의 아내들이 살을 맞대고 사는 남편들이 얼간이나 바보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남자들은 타고난 허풍쟁이이다. 사냥터나 전쟁터에서 상대에게 겁을 주거나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려고 복어처럼 몸을 부풀리다 보니 그런 유치한 성벽을 유전자에 새기게 되었으리라. 이렇듯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니 자신이 선택한 후보가 최선이라고 굳건하게 믿는 것이다. 남에게 시비를 거는 열혈 지지자 중 여자가 거의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유시민의 흠을 잡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닐까.

그렇듯 자신감이 넘치는 마련해서는 사람들의 기억력은 정말로 형편없다. 미국 형사 법정에서 자신감 있게 범인을 지목한 증인의 30%는 헛다리를 짚는다. 저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지원서를 작성하는 도중에 대화를 나누던 상담자가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접수대 밑으로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올라와도 변화를 눈치 챈 학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를 ‘변화 맹시’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정말 엉망이라고 할 정도로 기억력 착각이 심하다.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한두 번은 했을 텐데, 사람들은 남이 한 멋있는 일이나 말을 종종 자기가 한 것으로 기억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케네디 대통령이 죽어 미국 전역이 슬픔에 잠겼을 때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3분의 2가 자신이 케네디를 찍었다고 주장했다. 닉슨과 맞붙었던 1960년의 선거는 50대50의 박빙 승부였는데도 말이다. 세월이 가고 상황이 변하면 사람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찍었던 후보마저 헷갈리는 것이다. 변화 맹시 연구 전문가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웹 브라우저처럼 작동한다. 웹 브라우저 링크를 따라가면 콘텐츠가 그 즉시 나타나지만 ‘수신기’인 PC에 저장된 정보는 사실상 별로 없다. 인간의 뇌는 저장하는 힘보다는 불러내거나 읽어내는 기능이 강한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저널리스트·기업가·광고업자·정치인들이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혹은 우연히 이런 착각을 이용한다. 이를테면 원자력발전소나 금산 분리에 관한 세부적이고 복잡한 정보 폭격을 당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된다. 저자들은 이를 ‘지식의 저주’라고 부른다.

지식의 저주라는 주술에 걸린 사례는 많다. 지금도 사람들은 날씨와 관절염 통증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실험을 했지만 날씨가 궂으면 통증이 증가한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음악이나 비디오 게임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도 미신에 불과하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아이가 영재가 될 거라 믿고 지금도 전 세계 부모가 매년 수억 달러를 아낌없이 지불하지만 모차르트 효과는 없다. 많은 사람이 뒤통수를 열심히 노려보면 그 사람이 눈치 챌 거라고 믿지만 이런 ‘식스 센스’의 존재 역시 실험에서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인간의 정신에 드리운 이런 장막의 성격을 이해한다면 자신은 불안해지겠지만 남에게는 더욱 관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멍청하거나 무지해서 그토록 미친 듯이 전화를 걸어대거나 댓글을 다는 게 아니라니까 다행이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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