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모두에게 대놓고 물어봤다. 서울 지역 한나라당 의원 수는 48개 지역구에서 총 40명. 이 중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이재오·진수희 의원을 제외한 38명에게 “이대로 간다면 한나라당이 서울에서 몇 석을 건질 것 같은가”라고 물었다. ‘분위기’나 ‘기류’ 따위 두루뭉술한 표현 대신, 한나라당이 느끼는 위기감의 폭과 깊이를 제대로 측정해보기 위해서다.
“지방선거 때보다 지금이 더 나쁘다”
38명 중 공성진·정몽준 의원 두 사람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통화가 된 36명 중 34명이 이런저런 표현을 동원해 나름의 예상치를 내놓았다. 콕 집어 숫자를 말하는 의원도 있었고, ‘잘 하면 몇 석, 못하면 몇 석’ 식으로 범위를 내놓기도 했다. “지금 나오는 여론조사 결과에서 무조건 10% 빼야 한다. 그게 체감 민심이다”라는 말은 하도 여러 의원에게 들어, 마치 당의 공식 견해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서울 지역 전체 지역구의 절반인 ‘24석’을 예상한 의원도 8명 있었다. 강북 지역의 한 의원은 한나라당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나쁜지를 한참 하소연한 후에 “그래도 민주당이 너무 못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 덕에 반반 싸움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25석 이상’을 예상한 의원은 단 세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 “열심히 하면 안 될 것도 없다”라며, 예측이라기보다는 희망사항에 가깝게 ‘30석’을 말한 것이 최댓값이었다.
이 정도면 목소리 큰 비관파의 엄살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탄핵 역풍이 불어 가장 상황이 나빴던 17대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16석을 건졌던 것에 비춰보면 위기감의 폭과 깊이가 짐작이 간다. ‘둘 중 하나는 죽는다’ ‘비교적 안전한 강남권을 논외로 하면 둘 중 하나도 장담 못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지역주의 변수가 상대적으로 약한 서울의 여론은 전국 여론의 잣대로 간주되곤 했고, 서울 지역구 의원은 따라서 여론 동향에 가장 민감한 정치 집단으로 꼽혔다. 바로 그 서울에서 위험신호가 뜬 것이다.
“주민들이 무슨 얘기를 하시냐고? 물가 얘기, 물가 얘기, 그리고 물가 얘기 하신다.” 서울의 설 민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 의원은 이렇게 되받아쳤다. “물가 비싸서 못 살겠다”라는 하소연 외에는 들은 이야기가 없었단다. 해적이나 구제역 이슈는 거의 논외였다. 정태근 의원(성북 갑)은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 인상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체감이 확 오니까 정말 무섭다”라고 말했고, 김용태 의원(양천 을)은 “자주 가던 김치찌개집이 찌개에서 돼지고기를 뺐더라. 설 내내 시장 가서 혼나고 고깃집 가서 혼나고 그랬다”라고 말했다. 응답자 36명 중 물가 이슈를 언급한 의원이 27명이나 되었다.
특히 올해는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찍어낸 화폐 때문에 세계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부·여당이 물가 관리에 실패하면 대대적인 민심의 분노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설 민심에 덴 한나라당은 2월11일 정부와 물가대책 당정회의를 열기도 했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 눈치다.
서울 지역 의원들은 경제성과가 좋다고 자랑하는 청와대와 정부의 ‘선전전’에 오히려 더 속이 터진다. 경제지표와 실물경제 간의 괴리가 확연한 탓이다. 지표상 호황을 자랑하던 참여정부도 정작 실물경기가 얼어붙으면서 500만 표차로 대선 참패를 당했던 기억은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생생하다.
당 지도부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월8~9일 진행된 개헌 의원총회는 유권자 정서만 고려하면 ‘헛발질’이었다는 지적이 많았다(오른쪽 상자 기사). “죽도록 지역을 뛰어다니면 뭐하나. 청와대의 요상한 개각 한 방, 당 대표의 보온병 한 방에 다 도루묵인데. 요즘은 청와대와 당 지도부가 도와주는 건 기대도 안 하니 훼방만 안 놓았으면 좋겠다.” ‘힘든 밭’으로 평가되는 한 지역구 의원의 한탄이다.
‘서울 보수당’은 ‘한여름밤의 꿈’
18대 총선 직후만 해도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이른바 ‘서울 보수당의 탄생’에 흥분하는 목소리를 더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호남 인구가 많고 교육 수준과 민주화 열망이 높아 전통적인 ‘야도(野都)’였던 서울이, 18대 총선을 기점으로 ‘보수 정당의 지지 기반’으로 바뀌었다는 자신만만한 분석이었다.
‘자산 소유자의 도시’ 서울이 지속적으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선택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한나라당에 있었다.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한나라당 표가 늘어난다’는 정치권의 공인된 속설을 서울 전체에 적용해, ‘뉴타운 사업이 완료되면 서울에 한나라당 표가 늘어난다’는 결론을 내리곤 했던 것이다. 이는 또한 영남이라는 든든한 지역적 뿌리를 둔 친박계에 견주어 지지 블록이 취약한 친이계가, 장기적으로 수도권을 지지 블록으로 삼는 정치 세력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도 필요한 결과였다.
지방선거 이후에도, 이런 ‘보수 도시 서울’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김동성 의원(성동 을)은 “한나라당 지지율을 보면, 서울 지역 지지율이 전국 지지율에 비해 꾸준히 높게 나온다. 더 이상 서울이 보수 정당에 ‘나쁜 밭’이 아니라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정례 조사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 지지율은 2007년 대선 무렵부터 서울이 전국을 웃돌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 추세가 유지되고 있다(〈표 1〉).
하지만 4선의 홍준표 최고위원(동대문 을)은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분석을 내놓았다. “역대 선거 결과(〈표 2〉)를 보면, 서울은 원래 보수 정당이 20석 이상 얻기 힘든 곳이었다. 17대·18대 총선이 연달아 ‘바람 선거’여서 잊고 있지만, 일반적 구도에서 붙으면 그 정도로 수렴될 거다.” 서울이 지금 특히 힘들다기보다는 ‘장기 추세’로 돌아서고 있으며, ‘서울 보수당’의 탄생을 논할 근거는 없다는 의미다.
총선까지 1년여가 남은 시점에서 서울 지역 한나라당 의원들은 “다들 원외 당협위원장처럼 바닥을 훑고 있다”(진성호 의원)라고 말할 만큼 ‘지역구 올인’ 분위기다. 청와대와 당 지도부는 “이명박 정부의 성공이 총선 승리로 가는 지름길이다”라며 일사불란한 대오를 강조하지만,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이토록 심각한 상황에서 현장 의원들에게 어디까지 먹혀들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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