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지는 않지만 북적임 없이 살기 좋은 마을. 단원고등학교가 위치한 고잔동이 그랬다. 1992년 결혼과 함께 안산으로 이주한 오혜란씨(45)는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단원고가 가깝다. 세월호 참사 이후 도로에는 차량이 줄었고, 시내에는 음악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물건) 사세요’ 외치는 상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안산 시민은 모두 상주나 다름없다.

오씨는 지난 2월 단원고를 졸업한 딸의 마음에 생긴 생채기를 짐작하지 못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날 ‘아는 친구가 있니?’라는 물음에, 방문을 닫고 들어간 딸은 열흘이 지나서야 간신히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과 후배, 친구의 동생이 숨졌어. 시신을 찾으면 장례식장 가서 조문하고, 같이 있을 거야. 집에 못 들어오는 날이 많을 거야.” 어른들이 미련하게 희망을 말하는 사이, 아이들은 체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딸은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오는 날이 잦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오혜란씨의 딸도 2년 전, 이번에 사고를 당한 학생들과 똑같은 코스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시사IN 이명익 오혜란씨의 딸도 2년 전, 이번에 사고를 당한 학생들과 똑같은 코스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딸아이를 보면서 ‘슬픔으로 그치면 바뀌는 게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오씨와 의견을 같이하는 동네 ‘아줌마’ 셋이 모였다. 4월28일, ‘할 이야기는 하는 엄마’ ‘진상 규명을 외치는 엄마’가 되기 위해 ‘엄마의 노란 손수건’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카페 문을 연 지 사흘 만에 6000명이 모였다. 이들은 노란 손수건을 머리에 쓰고, 노란색 피켓을 들고 매일 저녁 7시30분 안산문화광장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5월5일에는 안산합동분향소에서 단원고등학교까지 침묵 행진을 했다. 안산 지역 공장에서 일하는 남편의 회사 동료 가족을 모으고, 동네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그 외의 홍보 없이도 100명 가까이 참여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아빠, 엄마는 물론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도 자리를 지켰다.

2년 전, 오씨의 딸은 세월호 참사가 난 코스로 제주도행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돌이켜보니 자신의 딸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사고였다. 지난해, 혹은 내년에 일어났다면 또 다른 누군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오씨는 “내 아이만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두고 어떤 잇속을 챙기고 있었는지, 왜 속였는지 알고 싶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제규·장일호·송지혜·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