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수업 첫날. 교수님이 칠판에 서울시 지도를 붙여놓고 말한다. “자, 한 명씩 나와서 집에서 학교까지 오는 길을 지도 위에 표시하도록.” 서울? 넓다. 사는 곳? 다 다르다. 한 명씩 나왔다 들어갈 때마다 지도 위 여기저기에 빨간 선이 복잡한 손금처럼 그어진다. 이제 승민(이제훈)의 차례다. 학교에서 집까지, 매일 타고 다니는 버스 노선 따라 빨간 펜으로 선을 긋기 시작하는데… 어? 이미 누가 그어놓은 선 위로 똑같이 따라 긋고 있는 거다. 승민의 펜이 멈춘 곳은 ‘이미 누가 그어놓은 그 선’이 멈춘 곳과 같다. 정릉.

승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볼이 살짝 빨개졌던 것 같기도 하다. 조금 전 서연(수지)이 그은 선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아까 처음 눈이 마주친 이후로 자기도 모르게 자꾸 훔쳐보게 되는 그녀이기 때문이다.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같은 또래. 집과 학교를 오가는 710번, 같은 노선 버스 위에서 두 사람의 사랑학개론은 시작되었다.


승민과 서연처럼 당신이 90년대 학번이라면, 그래서 펜티엄 1기가 컴퓨터에 입이 떡 벌어지던 그때를 기억한다면, 삐삐에 메시지 남겨놓고 손톱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려본 경험이 있다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처음 듣고 마음의 무릎이 탁 꺾이며 털썩, 마치 내 청춘까지 맥없이 주저앉은 양 괜히 ‘센치’해졌던 적이 있다면, 〈건축학개론〉이 아마 내 이야기 같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90년대 학번이 아닐지라도, 어느 교실이나 강의실 안에서 힐끔힐끔 누군가를 훔쳐본 적이 있다면, 수업이 끝난 뒤에도 괜히 그 사람 주변을 맴돌아도 보았다면, 그렇게 짝사랑을 시작했다면, 또 그렇게 첫사랑을 시작해보았다면, 그래서 단 한 번이라도 누구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그 누구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기만 하다면! 〈건축학개론〉은 분명 내 이야기 같을 것이다.

잘 만든 영화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내가 가져보지 못한 추억을 내가 가져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론 ‘영화 같은 로맨스’를 해보지도 못했으면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어쩌면 그이도, 우리의 볼품없는 연애를 나름 괜찮았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하게 된다. 기분 좋은 착각, 제멋대로 상상. 그래서 서연이가 그어놓은 빨간 선 위로 오늘 아침 자신이 지나온 궤적이 겹쳐지는 걸 확인하고 미소 짓는 승민처럼, 이 영화가 그리는 청춘의 궤적이 내 연애의 흔적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데 감탄하며 슬며시 미소 짓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신의 연애담이 특별히 애틋해서라기보다는 〈건축학개론〉이 특별히 잘 만든 영화라서 그렇다.


배우도 연애도 집도 정말 예쁜 영화

자,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두 사람이 건축가와 건축주로 다시 만났다. 서연(한가인)이 살게 될 제주도 집을 함께 지으면서 참 서툴던 연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승민(엄태웅). 마르지 않은 콘크리트 위에 꾹 눌러 찍은 서연의 발자국처럼, 아직 충분히 단단하지 못했던 마음 위로 꾹, 눌러 상처만 남기고 끝나버린 첫사랑이 다시 또렷해진다. 집을 튼튼하게 지을수록 마음엔 자꾸만 빈틈이 생긴다. 아, 두 사람… 이제 어쩔 거니?

촘촘했던 스무 살 연애담에 비해 서른다섯의 후일담엔 조금 빈틈이 보인다. 이제훈과 수지(스무 살의 승민과 서연)의 에피소드는 줄곧 반짝이는데 엄태웅과 한가인의 이야기가 살짝 밋밋해서다. 그래서 스무 살의 ‘건축학개론’엔 A+, 서른다섯 살의 ‘건축 실습’엔 B+. 그래도 이 영화의 평균 학점은 여전히 A다.

예쁜 척하는 영화는 많다. 정말로 예쁜 영화는 많지 않다. 배우도, 연애도, 집도, 풍경도 모두 예쁜 〈건축학개론〉. 보고 나면 술 좀 당길 거다. ‘기억의 습작’ 틀어놓고 후우~ 괜히 한숨 한번 쉬게 될 거다, 이 아저씨들아!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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