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붕괴를 기록한 사람들
  • 베를린·남문희 기자
  • 호수 619
  • 승인 2019.08.0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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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베를린 주재 서독 언론 특파원, 동서독의 언론학자, 동독 기자 등을 만나 분단 독일과 통일 과정, 그리고 언론의 역할에 대해 들어보았다.
30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를 목격하고 기록한 이들이 있다. 분단 당시 동독의 동베를린에 주재했던 서독 언론 특파원, 동서독의 언론학자, 그리고 동독 기자 등이다. 이들을 직접 만나 분단 독일과 통일 과정, 언론의 역할에 대해 들었다. 지난 호 ‘부활한 공룡, 공포 몰고 오나(제618호)’ 기사에서 지적했듯 독일인들에게 통일은 ‘과거의 역사’일 뿐이다. 한국인들에게 통일은 ‘현재진행형’이다.

■ 본명 대신 가명을 쓴 서독 언론의 동독  특파원


칼 하인츠 바움 씨(78)가 서독 신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의 특파원으로 동베를린에 파견된 것은 1977년이었다. 그의 나이 36세. 동서독은 1974년 언론사 특파원의 상호 교환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이 신문사의 두 번째 동베를린 특파원이었다. 사무실은 전임자한테 물려받았다. 20층짜리 대형 건물의 5층에 있었다. 건물관리인은 그에게 ‘몇 층에서 왔느냐’라고만 물을 뿐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EPA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서서 장벽 붕괴를 축하하는 동서독 시민들.
동베를린에 도착한 첫날, 이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한테 충고를 받았다. 가급적 본명을 쓰지 말라고 했다. 본명을 쓰면 특파원이라는 것이 드러나, 취재하는 데 지장이 있을 거라고 했다. 바움 씨는 그의 어머니가 예전에 사용했던 프랑케라는 가명을 쓰기로 했다.

동독 정보기관인 슈타지 문서에서도 그는 프랑케로 통했다. 특파원으로 지낸 지 5년 뒤인 1982년 7월7일자 슈타지 문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전형적인 저널리스트다. 반사회적 행동 경향을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사회주의의 적이다. 친구들과 관계가 복잡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사람들을 처음 만날 때 자신이 서독 신문의 특파원이라는 것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슈타지 문서는 여러 사람이 작성했다.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자는 볼퍼라는 동독 저널리스트였다. 가깝게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바움 씨는 통일 이후 공개된 슈타지 문서를 보기 전까지는 볼퍼가 슈타지의 비공식 협력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시사IN 남문희칼 하인츠 바움 전 동베를린 특파원
슈타지 문서 중 그의 마음에 쏙 드는 내용도 있었다. 집을 비운 사이 슈타지 요원이 그의 방을 뒤지고 남긴 소감이었다. “우리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방을 어지럽혀 놓았다.” 그는 동독에 주재하는 동안 전화번호나 일정을 기록하지 않았다. 통째로 암기했다. 동베를린 특파원으로 일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슈타지 요원이 그를 3주 동안 감시하기도 했다. 나중에 문서로 확인해보니 슈타지 요원들의 근무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30분까지였다. 슈타지 감시자들은 저널리스트들이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몰랐다. 바움 씨는 낮 시간에 주로 자거나 글을 쓰면서 보냈다. 저녁 뉴스가 끝난 다음인 오후 8시25분쯤부터 사람들을 만났다. 숙소로 돌아와서 잠드는 시간은 새벽 2시쯤. 즉 바움 씨는 슈타지 감시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것이다. 슈타지 요원들은 간혹 ‘자동차 주차 위치가 어제와 다르다’라고 문서에 기록해놓기도 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1961년 이전에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녔다. 동독에 대해 잘 알고, 지인도 많았다. 동베를린 특파원으로 뽑혔을 때 그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렵지는 않았다. 특별히 취재원을 새로 개발하기보다 전부터 알던 친구들을 주로 밤에 만나 취재했다. 1974년 동서독이 체결한 ‘특파원 상호교류 협약’에는 ‘신변보호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움 씨는 비록 동베를린 내에서였지만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지방에 갈 때는 별도의 허가가 필요했다.

기사 송고는 전화를 이용했다. 동베를린에서 기사를 부르면 본사에서 받아 적었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전화를 거는 경우, 본·쾰른과 프랑크푸르트로만 가능했다. 서독에서는 동독의 어느 곳으로나 전화할 수 있었다. 서독의 큰 신문사는 대개 함부르크나 프랑크푸르트에 있었다. 다른 지역 언론사들의 부탁을 받아 기사를 송고하기도 했다. 당시 동베를린에 서독 특파원 22~23명이 있었다. 거기서 1990년까지 13년 동안 1000여 건의 기사를 썼다. 취재 영역을 정해놓지 않고 동독의 모든 모습을 기록했다.

동독을 비판하는 기사를 쓸 수도 있었다. 바움 씨는 마인츠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과거에 썼던 기사를 읽어준 적이 있다. “쫓겨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동독이 저널리스트들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자 이를 풍자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동독 공산당 기관지 <인터내셔널>이 우리(기자들)의 일상을 계획한다. 아침 7시30분에 깨우고, 일정도 하나하나 쫓아가며 지시할 작정인가.” 동독의 한 관료가 나중에 “당신을 깨우진 않을게”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에 쓴 기사다. 그는 1989년 11월9일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 선전담당 비서 귄터 샤보브스키가 ‘여행 자유화’를 발표하는 현장에 있었다. 당시 오후 6시에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원래 다음 날 새벽 4시부터 여행이 자유화된다고 해야 하는데 귄터 샤보브스키는 ‘바로 지금’이라고 발표했다. 그것을 결정하는 회의에 들어가지 않아서 여행 자유화가 언제부터 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 소식이 즉각 서독 방송을 통해 보도됐으나 다들 그 의미를 몰랐다. 그날은 원래 축구 경기가 있었다. 서독 1공영방송에서 밤 10시45분 축구 경기가 끝난 다음 앵커는 “언론인은 절대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이후로 닫힌 문이 열린다”라고 말했다. 그제야 사람들이 그 의미를 알고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사실 그때까지는 아직 문이 열리기 전이었다.

■ 서독 방송을 보는 동독 사람들


ⓒ시사IN 남문희앙케 피들러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
당시 서독 언론의 역할에 대해 앙케 피들러 교수(베를린 자유대학 언론·커뮤니케이션학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에 서독 언론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서독의 입장이다. 실제로 동독 주민들은 서독 방송을 많이 봤다. 장벽이 무너지기 몇 달 전부터 서독 언론을 시청하던 동독 주민들이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영향을 과도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언론 이외에 다른 요인도 많았기 때문이다.

동독 교회 단체의 움직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6년부터 교회 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동독 산업의 쇠락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던 시기였다. 주민들이 굶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생필품이 부족했고 그 품질도 열악했다. 동독 주민의 불만이 커졌다.

1970년대에는 동독 사회주의 체제에 만족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 동독 체제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다. 1989년에는 동독의 교회 단체를 진원지로 체제 비판적 시위가 확산된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이를 ‘월요 시위’라고 불렀다. 시위에 합세하는 주민이 점점 불어났다. 서독 언론은 시위 현장을 찍어서 방송에 내보냈다. 그 영향으로 시위 규모는 더 커졌다. 당시의 동독 언론은 변화하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단순한 반정부 시위로 판단했다.

1989년 6월, 중국 톈안먼에서 대규모 군중 시위가 일어났다. 동독 시민들은 톈안먼 시위를 서독 언론으로 목도한다. 동독 언론은 중국 정부의 톈안먼 시위 진압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동독 시위대 사이에서 자신들도 잔인하게 진압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이때 서독 방송의 보도가 큰 구실을 했다. 서독 방송은 동독 정부가 무력 진압을 못하도록 막아주는 안전장치였다.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당시 서독 언론의 동베를린 특파원들은 평화시위가 일어난 라이프치히에 접근할 수 없었다. 라이프치히 시위는 동독의 제보자들 덕분에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 6월24일, 라이프치히 소재 중부독일방송(MDR)에서 만난 지그베르트 셰프케 씨도 바로 ‘동독 제보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1989년 9월11일 라이프치히의 첫 번째 평화시위를 동영상으로 찍어 서독 언론에 제보했다. 이 역사적 평화 시위에는 주민 7만여 명이 모였다. 플래카드는 세 개밖에 없었다. 군인과 경찰이 시위에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주민들은 두려웠다. 다행히 군인들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발포하지 않았다.
ⓒ시사IN 남문희지그베르트 셰프케 기자
셰프케 씨는 교회 위로 올라가 시위의 전 과정을 촬영했다. 그가 당시에 찍은 동영상은 함께 작업한 아람 라도무스키의 이름으로 지금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영상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평화혁명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그의 영상이 서독 방송을 통해 공개되자 시위대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다음 주에는 세 배나 많은 인원이 모였다. 동독 주민 80%가 서독 방송을 볼 수 있었던 덕분이다. 1989년 여름에 이미 체코와 헝가리를 여행 중이던 동독인 1000여 명이 해당 지역의 서독 대사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 장면이 서독 방송에 보도되면서 동독 주민들에게 전파되었다. 10월9일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그 한 달 뒤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당시 셰프케 씨는 기자가 아니라 건축 엔지니어였다. 서독 언론의 동독 주재 특파원들은 동베를린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셰프케 씨는 동독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언론 활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촬영한 녹화 테이프를 주로 외교관들을 통해 서독으로 밀반출했다. 슈타지에서도 그가 촬영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어떻게 테이프를 빼돌리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행위를 한 이유에 대해 그는 “다른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있는 거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셰프케 씨는 1990년 MDR이 출범할 때 기자로 채용돼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 시민들과 함께 행진한 동독 기자

동독 언론인들은 그때 어떤 상황이었을까? 불프 스카운 박사(74)는 동독 언론인들을 양성하던 사람이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쳤다. 라이프치히 대학에는 1954년 저널리즘학과가 생겼다. 해마다 120명 정도의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스카운 박사는 당시 6개 세미나 그룹을 주관했다. 당시 저널리즘학과 학생들이 생활하던 기숙사는 ‘붉은 수도원’이라 불렸다. 저널리즘학과의 목표는 ‘당에 충성하는 기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동독에서 저널리즘은 공산당과 정부를 수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른 모든 학과는 교육부 산하였지만 저널리즘학과는 당 중앙위 산하 선전선동부 소속이었다.

ⓒ시사IN 남문희불프 스카운 박사
1980년대 동독 경제가 악화되고 주민들의 불만이 점증했지만 공산당 기관지들은 현실을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 스카운 박사는 1982년 동료 학자들과 대학원생 40여 명의 조력을 받아 15개 공산당 기관지의 반년 치 기사 13만 건을 분석했다. 동독 사회주의에는 어떤 문제도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롭다는 논조가 대부분이었다. 문제점에 대한 보도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저널리즘학과의 상부 기관인 공산당 선전선동부는 스카운 박사 등의 연구 결과가 호네커 서기장에게 전달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이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동독 공산당의 위성정당 기관지에서 일했던 토마스 마이어(70) 전 <라이프치거 폴크스자이퉁> 기자는 동독 기자들의 일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일간지는 모두 공산당 산하 조직이었다. 공산당 이외에도 4개 위성정당이 존재했다. 이런 위성정당의 기관지 역시 실질적으로는 공산당을 대변했다.

그래도 차이는 있었다. 공산당 기관지 소속 기자들은 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자발적 신념으로 기사를 썼다. 반면 위성정당 기관지 기자들의 이념 성향은 다양한 편이었다. 낮엔 공산당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썼지만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서독 방송을 보며 동독의 현실에 화를 내기도 했다.

정치 기사를 작성하는 동독 기자들의 머릿속에는 ‘검열하는 가위’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 영역 너머를 보면 동독 사회의 삶도 다양하고 다채로웠다. 자연재해 및 각종 사건과 사고, 문화행사도 있었다. 이런 영역에서는 자유로운 기사 작성이 가능했다고 한다. 4개 신문이 네 가지 다른 의견을 내 논쟁하기도 했다.

마이어 씨는 라이프치히에서 7만명 정도의 대규모 평화시위가 펼쳐진 1989년 10월9일, 사무실에 있었다. 검열 때문에 평화혁명에 대해 대서특필하지는 못했다. 퇴근 후에는 시내로 나가 시민들과 함께 행진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 저널리즘 교육과정’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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