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도시2〉를 보면서 의외의 순간을 자주 경험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다. 이 형식에는 공정해 보이든 그렇지 않든 엄연한 편집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래서 언제나 실체를 어그러뜨리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 발견된다. 마이클 무어가 종종 그것을 ‘악용’한다. 어찌됐든 최소한 거기 기록된 개별 순간들만은 앞의 컷과 다음 컷의 연결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해석’과는 무관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실제 기록임에도 실제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이미지들이 포함돼 있다. 그것은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화자, 즉 감독은 자신의 의도나 방향성과는 무관한 이런 순간들을 목격하면서 당황한다. 완벽하게 계획되고 의도대로 운용된 다큐멘터리에 익숙했던 관객들에게, 이건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다.

지난 2003년 귀국한 송두율 교수가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천주교공원묘지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조부의 묘에 술을 올리고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 그렇다. 여태 송두율 교수의 귀국과 그의 입장을 옹호해주던 사람들이 사실상의 사상 전향을 강권함으로써 더 숭고한 이상의 실현과 역사적 대의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는 장면. 교수가 기자회견장에서 지난날의 과거를 반성하고 전향 의사를 밝히는 장면. 박홍 신부가 교수를 붙잡고 사울이 바울이 되는 기적과 은혜에 관해 논하는 장면.

이런 장면들 속에서 송두율 교수의 얼굴은 매우 괴상해 보인다. 그의 한쪽 눈은 더 감겨 있으며 풍선 위에 아무렇게나 그려 넣은 표정처럼 어색하게 일그러진 미소는 다른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의 ‘레더 페이스’처럼 부조리해 보인다. 카메라 렌즈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은 송두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되 송두율이라는 존재감을 동반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은 거기 없다. 어떤 분장이나 효과의 도움 없이 만들어진 이 끔찍한 표정들을 지켜보며 관객은 탄식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우리가 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누군가는 이 영화를 특정 진영의 자기분열적인 역사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이나 조직의 생명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특정 진영의 이기주의로 해석하기에도 용이하다. 누구나 자기반성은 필요한 것이니 잘된 일이다.

그러나 실체는 조금 더 지독하다. 좌든 우든 개혁이든 반동이든 우리는 결국 똑같은 인종이다. 우리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울이 바울이 되는 전향의 드라마가 발견되길 욕망한다. 그것은 역사적 대의와도, 운동의 생명력과도, 숭고한 당위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얼마 전 중국 장시성 출신의 33세 꽃미남 노숙자가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그러나 새로 노출된 사진에서 노숙자의 얼굴은 더 이상 꽃미남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전투적인’ 실망이 이어졌다. 아무개의 실체와 진실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욕망에 의거해 개인을 소환하고 해석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만든 세상이다.

이러한 의외성들 때문에 나는 〈경계도시2〉에서 ‘메시지’가 아닌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경계도시2〉는 지난 몇 년간 보아온 다큐멘터리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이며, 화자의 정직하고 공정한 역할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내리는 놀라운 영화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이자 뮌스턴 대학 교수인 송두율(66)은 1968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뒤 1970년대 현지에서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반체제 인물’로 분류됐고, 1991년 북한의 초청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는 이유로 ‘친북 인사’로 분류됐다.

그래서 2003년 9월2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을 받아 37년 만에 귀국한 송 교수는 다음 날 바로 국정원 조사를 받아야 했다.

국정원과 검찰 조사가 진행될수록 사건의 초점은 ‘송 교수가 무엇을 말하러 한국에 왔는가’보다 ‘그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가 아닌가’, ‘그는 우리 편인가 아닌가’를 검증하는 데에 맞춰졌다. 특히 송 교수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알려지자, 김세균 서울대 교수의 말마따나 “전쟁이 나도 그만큼 떠들썩하지 않을 정도로” 보수 신문들은 송 교수 기사로 지면을 도배했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행적을 반성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법질서를 지킬 것을 맹세하라”라고 철학자에게 사실상의 ‘전향’을 요구했다.

이 사건이 법원에 넘어간 뒤, 송 교수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철학 사상과 무죄의 근거들을 낱낱이 밝혔다. 하지만 이미 그를 ‘간첩’으로 결론내버린 한국 사회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04년 7월 2심 판결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된 송 교수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1년 뒤 대법원은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송 교수는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았다.   
기자명 허지웅(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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