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작품 중, 말년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서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살을 기도하면서 생긴 상처를 수건으로 감싼 채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그는 무슨 심정으로 그렸을까?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은 무겁고 아프다.

오늘 〈경계도시2〉를 바라보는 심정도 똑같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편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 송곳으로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된다. 100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우리는 쉴 새 없이 공격당한다. 조금도 용서가 없다. 빈틈이 없다. 우리는 마침내 피투성이가 된다.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다. 홍형숙 감독은 도대체 무슨 심보로 이 고약한 영화를 만들었단 말인가.

〈경계도시2〉가 이토록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남의 일이라고 치부하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실 영화의 처음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송두율 교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엑스트라로 전락한다. 그를 두고 벌이는 진보와 보수, 공안당국과 언론의 쟁투가 사건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 주인공들은 우리를 슬프게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웃기기도 한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운다. 비극이자 희극이다.

공안당국은 처음부터 그렇다 치더라도 여기에 등장하는 언론의 모습은 우리를 좌절케 한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이리 떼 같았다. 어차피 진실은 상관이 없었다. 표피적인 말 한마디에 집착하고 춤추는 사람들이었다. 공안기관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심층적으로 취재하고 분석하는 기사와 보도가 제대로 있었던가. 송 교수를 구속하라고 주장하는 우파, 그 위세에 눌려 그냥 전향서 하나 쓰고 용서를 빌어보자는 좌파, 그 모두가 송 교수와 그 부인에게는 하나의 폭력이었다. 평생을 양심과 오기 하나로 살아온 한 지식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양심을 버리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친구였고 나아가 나 자신이었다. 그 양심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온 삶을 다 바쳐 살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을까.

가수 김C, 〈경계도시2〉 감독 홍형숙, 박원순 변호사, 배우 권해효씨(왼쪽부터)가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 사회의 진면목 그대로 드러내

한국 사회의 진면목을 온통 그대로 까발린 이 영화는 그래서 처절하다. 참혹하다. 우리 모두 가해자였고 피해자였다. 좌와 우가 따로 없다. 우파가 부끄럽고 좌파도 부끄럽다. 나 자신도 부끄럽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을 것인가.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리 국민 모두가 보아야 할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보아야 할 국민 교과서이다. 비록 그것이 일그러진 모습이라 할지라도, 반 고흐가 자신의 찢어진 얼굴을 그렸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일은 그 절망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계도시2〉는 우리에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충고하고 있다. 우리의 실상을 똑바로 보라고, 우리가 그 현실을 외면하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 〈경계도시2〉를 보러 가자. 고통당하러, 고문당하러, 절망하러 가자. 그럼으로써 거기를 출발선으로 하여 그 고통과 고문과 절망의 벽을 넘어가자.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이자 뮌스턴 대학 교수인 송두율(66)은 1968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뒤 1970년대 현지에서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반체제 인물’로 분류됐고, 1991년 북한의 초청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는 이유로 ‘친북 인사’로 분류됐다. 그래서 2003년 9월2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을 받아 37년 만에 귀국한 송 교수는 다음 날 바로 국정원 조사를 받아야 했다.

국정원과 검찰 조사가 진행될수록 사건의 초점은 ‘송 교수가 무엇을 말하러 한국에 왔는가’보다 ‘그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가 아닌가’, ‘그는 우리 편인가 아닌가’를 검증하는 데에 맞춰졌다. 특히 송 교수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알려지자, 김세균 서울대 교수의 말마따나 “전쟁이 나도 그만큼 떠들썩하지 않을 정도로” 보수 신문들은 송 교수 기사로 지면을 도배했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행적을 반성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법질서를 지킬 것을 맹세하라”라고 철학자에게 사실상의 ‘전향’을 요구했다.

이 사건이 법원에 넘어간 뒤, 송 교수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철학 사상과 무죄의 근거들을 낱낱이 밝혔다. 하지만 이미 그를 ‘간첩’으로 결론내버린 한국 사회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04년 7월 2심 판결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된 송 교수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1년 뒤 대법원은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송 교수는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았다.   

기자명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