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가을, 한국 사회는 그렇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영화 중반, 감독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감독이 말한 그 ‘한국 사회’란 검찰과 국가정보원, 보수 단체와 진보 단체, 언론, 그리고 그들의 입에 눈과 귀를 기울이는 시민들까지를 포함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2〉는 결코 송두율에 관한 영화가 아니었다. 화면에는 송두율 교수가 가장 많이 등장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었다.

〈경계도시2〉는 제작 의도에 완전히 어긋난 작품이다. 홍형숙 감독은 애초 이 영화를 전작 〈경계도시1〉의 후일담 정도로 생각했다. 〈경계도시1〉은 간첩 혐의를 받으며 35년간 입국금지 상태였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가 늦봄 통일상을 수상하기 위해 귀국을 시도하다 좌절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몇 년이 흐른 2003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요청으로 송두율 교수와 그 가족이 드디어 한국 땅을 밟는다는 소식에 홍 감독은 “가벼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간단하게 찍을 수 있겠다 싶어” 카메라를 들었다. 하지만 촬영 기간은 송 교수가 한국에 머무르기로 한 3주를 훌쩍 넘어버렸다. ‘37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철학자의 감회’라는 영화의 잔잔한 주제는, 자연스레 ‘광기에 휩싸인 2003년 한국의 자화상’이라는 씁쓸한 주제로 탈바꿈했다.

관객 화나게 만드는 ‘찌질한 기자들’

‘간첩 송두율’이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무죄를 확정받아 독일로 돌아가고, 이후 송두율 사건과 비슷한 마녀사냥·사상 검증 광풍 사건이 대한민국을 몇 차례 더 휩쓰는 사이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2만분 분량의 촬영 테이프 더미를 끌어안고 고민하던 홍형숙 감독은 세상에 다시 ‘송두율’이라는 이름을 끄집어내기로 결심했다. 홍 감독은 사람들에게 〈경계도시2〉를 보여주는 자리에서 늘 초조해한다. “영화가 좀 아파요. 어쩌면 많이 불편하실 거예요.”  

영화는 이른바 ‘진보 세력’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특히 아프다. 〈경계도시2〉는 2003년 국정원 조사에서 자신이 조선노동당원임을 시인한 송 교수를 보고 혼란에 빠진 진보 인사들의 모습을 집요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송 교수는 “학술 활동을 위해 북한을 드나들려면 관례적으로 노동당 가입 절차를 치러야 했고, 이후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노동당원임을 의식하지도 않았다”라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은 “왜 진즉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냐”라고 진의를 의심했다. 홍 감독은 영화 내레이션을 통해 “그동안 그토록 반대해온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진보진영 스스로 들이댔다”라고 비판했다. 〈경계도시2〉를 보면 “노동당원이 어떻게 경계인이냐?”라는 보수 신문의 비아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도, “현 상황을 원칙이나 진정성으로 생각하지 말고, 축구할 때 골문을 수비하는 것처럼 기술적으로 생각하라”라고 노동당 탈당과 독일 국적 포기를 종용하는 것도 모두 송 교수 주변을 둘러싼 진보 단체 사람들이다.

7년 전의 그 처절했던 기억을 2010년 다시 스크린으로 접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칼럼니스트 한윤형씨는 ‘우리의 상식’이란 것에 의문을 표했다. “흔히 ‘수구 세력’이라고 표현되는 사람들을 제외한 우리들은 어떤 종류의 상식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니 그런 식의 구별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경제학 박사 우석훈씨는 송두율 사건을 ‘철학자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남북 분단 상황에서 ‘경계’라는 개념을 만든 송 교수의 철학자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경계도시2〉는 “조국이라는 게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철학자에게 충성을 맹세시키는 우리의 ‘찌질한’ 모습이 날것으로 팍팍 튀어나오는 자화상”으로 비쳤다.   〈경계도시2〉에서 그 누구보다 ‘찌질하게’ 비춰지는 자들은 바로 기자들이다. “한국에 온 걸 후회하세요?”라고 물어놓고 송 교수가 “네”라고 대답하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마디만 하시죠”라고 요구하는 기자, “김철수 맞죠? 맞죠? 맞잖아요?”라고 단편적 사실 하나에만 집착하는 기자, 송 교수가 한마디 발언하고 지나가자마자 모여서 취재 수첩을 맞춰보는 검찰 출입 기자들이 나올 때마다 관객은 자주 “에이씨”라고 짜증을 내뱉었다.

당시 송두율 사건을 취재한 한 일간지 기자는 “그때 경험 없는 사회부 경찰기자들이 사건을 맡다보니 사건의 큰 줄기나 한국 사회에 미칠 영향 같은 것에 학습이 전혀 안 됐던 건 분명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 보수 신문 기자가 송 교수가 재직한 뮌스턴 대학에 송 교수의 다음 학기 강의계획서가 없다는 이유로 ‘송두율은 교수가 아니다’라고 보도했다. 사건의 본질을 떠나 악의적으로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기자들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낀 기억이 난다”라고 말했다. 당시 기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괴롭지만, 송 교수 곁에서 그를 돕던 이들의 내밀한 회의석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관객에게는 큰 고통이다. 가까이는 2004년 총선, 멀리는 진보 세력의 앞날을 위해 이들은 송 교수에게 ‘전략적 후퇴’로 검찰에게 고개를 숙일 것을 설득한다. 하지만 영화 속 누군가가 절규하듯 “이들 모두 송 교수가 떠나 있던 모순의 땅 한국에서 몇 십 년 동안 피 터지게 싸우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쉽게 비난하기도 어렵다.

지난 3월9일 국회에서 열린 〈경계도시2〉 시사회에서 홍형숙 감독(오른쪽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이 관객들에게 영화를 설명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 중 몇몇도 〈경계도시2〉를 봤다. 생각은 각기 다르다. 당시 송두율 교수 석방대책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았던 김세균 서울대 교수는 “송 교수의 학자적 양심을 지키는 것과 그를 감옥에 넣지 않는 것 사이의 딜레마가 컸다.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던 과정이 었다”라면서도 “홍 감독이 영화에 담은 문제의식을 충분히 존중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송 교수를 변호한 김형태 변호사는 “영화의 시각이 너무 감독 일방적이다”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당시 모든 복잡한 고민들을 ‘진보들조차 레드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는 시각 하나로 잘라버리는 것은 사건의 진상을 왜곡한 것이다. 〈경계도시2〉는 사실상 송 교수를 소재로 작가가 쓴 소설이다.”  

〈경계도시2〉를 보고 아픔을 느끼는 것은 당시 사건에 휘말렸던 사람뿐만이 아니다. 지난 3월9일 국회에서 열린 〈경계도시2〉 시사회에 인터넷 카페 ‘소울 드레서’ 회원 이주희(21)·김보미(23)씨도 객석을 채웠다. 2003년 사건이 터졌을 때 각각 초등학교 6학년·중학교 3학년생이었으니, 〈경계도시2〉에서 거의 처음으로 송두율 사건을 접한 셈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는 이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았다. “2년 전 촛불 집회에 나가 난생처음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어봤다. ‘레드콤플렉스’라는 말의 뜻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 당사자가 돼 절절히 느껴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영화를 보고 ‘송 교수에게도 그만큼 지독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경계도시2〉는 3월18일 7개 영화관에서 개봉한다. 2010년 봄, 한국 사회가 다시 실체를 드러낼 차례이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이자 뮌스턴 대학 교수인 송두율(66)은 1968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뒤 1970년대 현지에서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반체제 인물’로 분류됐고, 1991년 북한의 초청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는 이유로 ‘친북 인사’로 분류됐다. 그래서 2003년 9월2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을 받아 37년 만에 귀국한 송 교수는 다음 날 바로 국정원 조사를 받아야 했다. 국정원과 검찰 조사가 진행될수록 사건의 초점은 ‘송 교수가 무엇을 말하러 한국에 왔는가’보다 ‘그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가 아닌가’, ‘그는 우리 편인가 아닌가’를 검증하는 데에 맞춰졌다. 특히 송 교수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알려지자, 김세균 서울대 교수의 말마따나 “전쟁이 나도 그만큼 떠들썩하지 않을 정도로” 보수 신문들은 송 교수 기사로 지면을 도배했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행적을 반성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법질서를 지킬 것을 맹세하라”라고 철학자에게 사실상의 ‘전향’을 요구했다. 이 사건이 법원에 넘어간 뒤, 송 교수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철학 사상과 무죄의 근거들을 낱낱이 밝혔다. 하지만 이미 그를 ‘간첩’으로 결론내버린 한국 사회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04년 7월 2심 판결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된 송 교수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1년 뒤 대법원은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송 교수는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았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