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5일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바흐무트 인근 최전방에서 러시아 군 진지를 향해 대공포를 발사하고 있다.ⓒREUTERS

2017년 당시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과 만난 뒤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은 19세기 말에 조선을 ‘외국’이 아니라 ‘속국’으로 분류한 바 있다. 중국 정부가 주도한 역사 수정 시도인 동북공정에 따르면, 고구려는 중국 왕조에 예속된 지방정부 내지 속국이었다. 한반도에서 임진강 이북(지금의 북한)은 중국과 인연을 가진 땅이라는 말도 된다. 만약 이 같은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역사 해석을 근거로 21세기의 중국이 한반도에 어떤 권리를 주장한다면, 한국인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현 시점에서 볼 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글로벌 지정학은 1980년대 말의 사회주의권 붕괴 당시를 연상시킬 정도로 요동치고 있으며 어디로 튈지 가늠하기 힘들다. 강자가 강자인 것은, 명분에 따라 행위하기보다 행위에 필요한 명분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벌여온 일이 최근의 대표적 사례다.

2월9일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러-우 전쟁)의 양상을 바꿀 대격전이 예상되고 있다. 러시아는 교착 상태인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전선에 십수만 명 규모의 새로운 병력을 투입할 계획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결사 항전의 입장을 확인하면서 미국·독일 등 서방국가에 무기 지원을 재촉하고 있다.

러-우 전쟁은 지난해(2022년) 2월24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 군사작전’ 명령에 따라 발발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2·24 전쟁). 그러나 두 나라가 실질적인 열전에 돌입한 것은 2014년(돈바스 전쟁)이다. 돈바스 전쟁의 기원은 2004년 우크라이나의 민주화 운동인 오렌지 혁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오렌지 혁명:20세기의 상당 기간 우크라이나는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소속된 한 공화국이었다. 소련의 소속국이라는 측면에선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푸틴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럽과 러시아의 경계선에 있는 이 지역에서, 러시아 및 폴란드와 맞서며 스스로를 ‘우크라이나’로 부르는 사람들의 집단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12월 국민투표를 거쳐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주권국가를 설립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자신들과 함께 소련 소속 국가였던 러시아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몇 차례에 걸쳐 우크라이나를 복속시킨 바 있었던 러시아가 자꾸 ‘우린 한 민족’이라고 우기는 것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적어도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발전된 경제 시스템을 갖춘 유럽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를 입증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2004년 오렌지 혁명이다. 그해 11월 독립 이후 세 번째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친러시아 정당(당시 여당) 후보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를 근소하게 누르자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대선 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유셴코 암살 기도 사건을 배경으로 숱한 부정선거 사례가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결정된 재투표에서 유셴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서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렌지 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린다. 유셴코 정권은 나토 가입 및 유럽연합(EU)과의 제휴협정(Association Agreement)을 추진하는 등 대체로 친EU 정책을 펼쳤다. 이 제휴협정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위한 첫 단계”이며 무엇보다 “법치와 민주주의 가치를 토대로 하는 국가에 살고자 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염원”을 확인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점진적 개혁론자인 대통령과 급진적 친유럽 개혁론자인 율리아 티모셴코 총리 사이의 갈등이 의회 해산으로까지 치달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난도 뒤따랐다. 유셴코 임기 말에는 총선에 참패하며 친러 정치인인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는 지경에 이른다. 야누코비치는 2010년 2월 치러진 4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 유로마이단 혁명:야누코비치는 국정 방향을 친러시아로 되돌리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자행했다. 나토 가입과 제휴협정 추진을 철회했다. 경제 측면에서도 EU와의 협력 대신 푸틴의 유라시아경제연합(Eurasian Economic Union)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러시아 흑해함대의 크림(크름)반도 세바스토폴 항구 임차 기간을 2042년(원래는 2017년)까지 연장했다. 이 조치의 후과로, 우크라이나는 향후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기게 된다. 이에 반발한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2013년 11월부터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벌인다. 이듬해(2014년) 2월엔 야누코비치 정권의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고 고문 살해하며 희생자의 시신을 거리에 걸어놓는 유혈 참극이 벌어진다.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끝에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달아났다. 이 사건을 유로마이단 혁명이라고 부른다. 유로(Euro)는 유럽, 마이단(Maidan)은 광장(키이우 중심부의 독립광장)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이 바로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이다.

■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동남부 끝자락에 자리 잡은 반도다. 우크라이나 남쪽으로 접한 흑해의 중심부를 향해 우뚝 돌출해 있다. 흑해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남유럽 국가들이 지중해를 경유해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는 길목이다. 그리고 흑해를 지배하려면 크림반도를 장악해야 한다. 러시아가 이 반도의 세바스토폴항을 빌려 흑해함대를 주둔시켰던 이유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유적들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다만 담수를 구하기 힘든 지형이라서 반도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드네프르(드니프로)강의 물을 북크림 운하로 공급받는다. 그곳에 헤르손이 있다. 우크라이나 군과 러시아 군이 치열한 공방을 펼치고 있는 바로 그 지역이다.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도주하던 2014년 2월엔 크림반도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크림반도는 러시아계가 전체 인구의 60% 이상을 점유하는 이른바 ‘친러’ 지역이긴 했지만, 그 이전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미 수년 전부터 네오 나치 등 러시아 국수주의자들이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서 공공연하게 활동하며 ‘독립’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해 2월 말엔, 러시아 하원 대표단이 방문해서 ‘합병 요청이 들어오면 검토할 것’이라고 말하더니 대규모 친러시아 시위가 벌어졌다. 곧이어 표식을 달지 않은 러시아 군(당초엔 크림 거주민들이 만든 자경단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세바스토폴항 주둔 흑해함대의 해군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들이 청사와 공항 등 인프라를 점거했다. 3월 들어서는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천 명 규모의 군대를 크림반도로 파병했다. 3월 중순, 크림반도 의회에서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결의했다. 직후 주민투표로 ‘러시아와 합병’이 결정되었다.

2014년 2월2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독립광장에서 유로마이단 시위가 벌어졌다. ⓒITAR-TASS

■ 돈바스 전쟁:크림반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돈바스는 소련 시절부터 금속산업 등의 공업이 발전한 지역이었다. 러시아계가 이런 국영기업의 경영인·관료·숙련 노동자 등으로 상류층을 이루고 있었으며 지역 인구의 30~40%를 점유했다. 그러나 정재원 국민대 교수(유라시아학과)에 따르면, “2013~2014년 러시아의 분리 선동 이전까지는 러시아계도 우크라이나인 등 다른 민족들과 특별한 갈등 관계에 있지 않았다”.

2014년 3월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에서 격렬한 친러시아 시위가 벌어졌다. 이어서 러시아를 업은 반우크라이나 준군사 조직이 지역의 일부(도네츠크의 절반, 루한스크의 3분의 1)를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한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언했다. 한국이라면 특정 행정구역의 일부 지역이 일방적으로 ‘우리는 대한민국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라고 자처하며 중앙정부의 통치권을 부정하는 꼴이다.

2014년 5월엔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이 가결되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고, ‘인민공화국(사실은 러시아 괴뢰)’ 측은 ‘독립’ 투쟁을 벌였다. 이를 돈바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정부군과 반란군의 대립 구도라니 마치 내전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내전이 아니라 ‘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전투를 벌인 이른바 ‘독립’ 집단의 주력이 러시아 본토에서 보낸 무장군인들과 무기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돈바스 전쟁은 이후 8년 동안 이어지다가 지난해 2월24일 전면전으로 확대된다.

2·24 전쟁의 전개

러시아는 2·24 전쟁으로부터 1년여 전인 2021년 3월부터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19만여 병력을 집결시켜놓고 있었다. 침공 사흘 전인 2022년 2월21일에는 도네츠크·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침공을 개시한 새벽,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탈군사화와 탈나치화”가 ‘특별 군사작전’의 목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8년 동안 키이우 정권에 의해 자행된 굴욕과 대량학살에 직면해 있는 돈바스의 인민을 보호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영토를 점령할 계획은 없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자결권을 지지한다.” 2·24 전쟁은 개전 이후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전황 변경을 거쳤다.

■ 1단계(2월24일~4월 초):러시아 군은 푸틴 연설 직후 사실상 우크라이나 전역의 주요 도시를 미사일로 공격하면서 4개 방향의 육로로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다.

우크라이나 북부의 벨라루스(러시아 동맹국)로부터 침공한 러시아 군은 수도 키이우로 진군했다. 북동부 국경 너머의 러시아 영토에서 출발한 군단은 키이우 동부로 진격하며 도중에 있는 도시들(체르니우, 수미)을 공격했다. 동부 돈바스의 러시아 군은 우크라이나 제2도시이자 공업지대인 북동부 하르키우로 쳐들어갔다. 러시아가 실효 통치 중인 크림반도에서 출발한 러시아 군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끝의 항구도시 마리우폴과 크림반도 머리 위의 헤르손, 서부의 흑해 연접 항구도시인 오데사를 노렸다.

전쟁 초기엔 러시아의 신속한 승리가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러시아 군은 고작 2~3일 만에 수도 키이우로부터 30㎞ 지점까지 진군하는 한편 하르키우도 점령했다. 3월 들어서는 크림반도에 담수를 공급하는 헤르손을 점령했다. 마리우폴도 포위·봉쇄한 뒤 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은 예상외로 치열한 우크라이나의 반격 때문에 목전에 둔 키이우로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키이우 근교의 부차에서는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키이우 점령이 어렵다고 판단한 러시아 군은 지난해 4월7일 우크라이나 북부와 북동부에서 철수한다. 러시아의 당초 전쟁 목표가 좌초한 것이다. 그들이 향한 곳은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의 전선이었다.

전쟁 발발 두 달째,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에 민간인 희생자 시신이 바닥에 놓여 있다. ⓒAP Photo

■ 2단계(4월 초~9월 초):러시아의 전쟁 목표가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 및 국토 병합에서 돈바스와 크림반도를 거점으로 하는 동부·남부 합병으로 전환되었다.

러시아 군은 포위·봉쇄 이후 6주 이상 공습을 퍼부은 마리우폴 역시 5월 중순에 폐허로 만들면서 함락시켰다. 식량 보급도 어려운 고립된 마리우폴에서 결사 항전한 우크라이나 정규군과 아조프(아조우) 연대는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전락했다. 7월 중순엔 돈바스 루한스크주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오데사는 물론 서쪽의 몰도바 국경까지 진군하겠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가 흑해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을 모두 러시아 영토로 만들겠다는 통보였다. 이런 와중에 우크라이나가 드디어 반격에 나서며 전황을 180° 바꿔버린다.

■ 3단계(9월 초~11월 중순):2022년 9월 초, 우크라이나 군은 동북부 하르키우를 완전 수복하며 러시아 군을 국경 너머로 밀어냈다. 러시아 군은 전차 등 군수품을 그대로 두고 달아나 큰 망신을 당했다.

9월2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정하며 30만 징병을 목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의 부분 동원령을 내린다. 이와 함께 그는 다시 핵 위협을 가했다. “‘우리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러시아 본토뿐 아니라 새로 합병한 우크라이나 영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모든 수단’엔 전술 핵무기 사용이 포함되어 있다. 푸틴의 발언 직후인 같은 달 9월23~27일, 러시아는 부분 점령 중인 도네츠크·루한스크·자포리자·헤르손 등 4개 지역에 대해 러시아 합병 찬반 주민투표를 시행한다. 합병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부터 남부 지역 공세를 본격화했던 우크라이나 군은 11월11일 헤르손을 수복한다. 헤르손은 우크라이나의 동부 회랑(돈바스-크림반도)과 남부 회랑(크림반도-오데사)의 교차점에 있는 요충지다. 이 시기에 우크라이나는 2·24 전쟁 발발 이후 잃었던 영토의 절반을 되찾은 것으로 평가된다. 중거리 정밀 타격 로켓 등 서방 지원 무기의 역할이 컸다.

■ 4단계(11월 중순 이후):11월11일 이후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동부와 남부의 기존 전선에서 수개월에 걸쳐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동부 지역의 요충지인 바흐무트에는 심지어 ‘고기 분쇄기’란 별칭까지 붙었다. 러시아는 용병 기업인 바그너 그룹을 전선의 선두에 세워 일부 지역에선 우크라이나 측을 곤경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감옥에 수감된 흉악범까지 석방한 뒤 바그너 그룹을 통해 전선에 동원하는 중이다. 2월 중순 현재, 양국은 ‘5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사전 작업을 벌이고 있다.

달라진 서방의 무기 공급 양상

러시아는 9월의 부분 동원령으로 징집한 십수만 병력을 동부와 남부 전선에 새로 투입하면서 대대적 공격을 벌일 계획이다. 교착 상태를 전환해서 승기를 잡기 위해서다. 이와 함께 민간 지역의 전력, 수도 등 인프라에 미사일을 퍼부어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항전 의지를 꺾으려 하고 있다.

지난해 5월15일 우크라이나의 한 병사가 폭파된 러시아 군 장갑차 옆을 지나고 있다.ⓒAP Photo

이를 방어해야 하는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미 지난해부터 미국·독일 등 서방국가에 최첨단 전차와 전투기 등을 요청해왔다. 서방 측은 러시아와의 긴장 고조를 두려워해 무기 공급을 꺼렸으나 지난 1월 말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1월25일 독일은 자국산 레오파드2 전차 14대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독일산 전차를 보유한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것도 허용한다. 미국도 같은 날 M1 에이브럼스 전차 31대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 옛 소련으로부터 물려받거나 러시아 군으로부터 빼앗은 전차로 싸워왔다. 서방에서 생산된 최첨단 전차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을지, 그리고 러시아와의 대격전이 벌어지기 전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될 수 있을지는 아직 추정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는 전차와 함께 전투기까지 서방국가들에 요구하고 있다. 지난 1월 말, 미국과 독일은 전투기 지원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2월 들어 거부 수위가 조금씩 낮아지면서,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고려·검토’까지 갔다. 외교적 해결을 선호하면서 무기 지원에 소극적이던 서방이 적극적 지원으로 돌아설 조짐이 보인다.

2월2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등 EU 고위 당국자 12명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두 국가의 대통령이나 총리 등이 키이우를 방문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EU 집행위원들의 단체 방문은 처음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월8일, 영국을 깜짝 방문해 리시 수낵 총리를 만났다. 가장 중요한 외빈에게만 허용하는 ‘웨스트민스터 홀 연설’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뒤 찰스 3세와 환담을 나눴다.

직후 프랑스로 이동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만났다. 2월9일에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사실상 전투기 지원 요청을 위한 유럽 투어다. 러시아 측은 “런던의 거지”라고 비웃었으나 젤렌스키는 일단 영국 측으로부터 전투기 지원 승낙으로 해석할 만한 신호를 끌어냈다. 정재원 교수는 “유럽 정상들이 ‘러시아의 임박한 공세가 성공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닥칠 것’으로 판단을 내린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해외의 시민사회에서는 러-우 전쟁으로 곡물과 원자재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 만큼 빠른 종전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 승리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전쟁의 추이에 걸린 세계와 한반도의 미래는 만만치 않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오른쪽)이 2월8일 영국을 깜짝 방문해 리시 수낵 총리를 만났다.ⓒAP Photo

러시아가 임박한 대공세에 실패해 수세에 몰릴 경우, 푸틴은 지난해 9월21일 언급했던 ‘핵 옵션’을 다시 끄집어낼 가능성이 있다. 지금 실효 통치 중인 크림반도까지 잃게 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젤렌스키는 ‘3단계’ 반격 이후 공공연하게 ‘크림 수복’을 언급하고 있다). 푸틴이 전술핵을 단지 협박과 협상력 높이기의 수단으로만 사용한다고 해도 이런 행위가 향후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은 지대하다.

전재성 서울대 교수는 〈국방전쟁연구〉 2023년 겨울호에 게재한 논문 ‘우크라이나 전쟁이 국제 안보 정세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과 함의’에서 이렇게 썼다. “(러시아가) 전쟁 과정에서 저위력 핵무기를 사용하여 군사적 이점을 얻는다면 이 역시 다른 국가들에게 큰 함의를 가질 것이다. (…)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북핵 사용의 문턱이 낮아지는 효과를 가져오는 상황이 초래된다면, 이는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러시아가 2~3월 대공세로 승기를 잡아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를 최종 획득하는 경우에도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전재성 교수에 따르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국제법 준수 등의 원칙”이 무너진 자리에 ‘다른 질서’가 비집고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다른 질서’는 ‘미국 일극’을 극복하고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오순도순 평화롭게 공존하는 미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 이외의 다른 강국도 다른 나라를 침공해 편입하며 자국 주도의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전재성 교수에 따르면, 러시아의 성공은 “중국의 전략, 특히 타이완 문제에 큰 함의를 가질 것이다”. 러시아가 하는데 중국이라고 못할 이유가 있는가. 만약 타이완이 아시아의 우크라이나가 된다면 한반도의 두 국가 역시 그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러-우 전쟁은 남의 일이 아니다.

기자명 이종태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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