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 ‘꽃구경’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세상은 온통 꽃핀 봄날. 아들은 꽃구경 가자며 늙은 어머니에게 등을 내민다. 춘궁에 못 이겨 입을 하나 줄이려고 노모를 내다버리려는 것이다. 어머니는 다 알면서도 아들 등에 업혀 좋아라 한다.

신이 있다면 장난이 심하다. 신이 없다면 공교롭다. 최선의 이면에는 최악이 도사린다. 아름다움 뒤에서는 남루함이 헐떡인다. 개나리·목련·진달래가 흐드러진 찬란한 봄날은 끔찍한 배고픔과 함께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봄은 축제의 계절인 동시에 혁명 연수 기간이다.

이 봄, 두드러지게 축제 분위기와 혁명의 기운이 함께 무르익는 곳은 대학가이다. 한 번 부르는 데 4500만원을 줘야 한다는 그룹 ‘빅뱅’을 비롯한 아이돌 가수에 열광하는 축제의 한편에서는 용역 노동자의 긴 탄식이 흐른다. 무엇보다도 그 공간에서는 언제 축제가 열리는지도 모르고 아르바이트를 뛰느라 정신이 없는 한 많은 청춘이 공존한다. 자기가 주체인 축제에서의 완벽한 소외이다. 미래까지 저당 잡혀가며 학생이 갖다 바친 수십명분의 등록금을 단지 흥을 돋우려고 아낌없이 내놓는 학교 권력자의 마음속에 가난한 젊은이의 눈물은 없다. 지배 세력이 썩어 문드러진 곳에서 혁명이 싹튼다면 지금 대학가는 언제 불길이 타올라도 이상하지 않다.

ⓒ한성원 그림
고양이처럼 민감한 봄날에 읽기 좋은 책이 나왔다. 제목부터가 〈반란의 조짐〉(여름언덕, 2011년)이다. 이 책은 스페인 내전 이후 70년 넘게 폐기된 걸로 치부되던 아나키즘 교리의 최신판쯤 된다. 민족주의·제국주의·군국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가 판치는 틈바구니에서 집요하게 국가(혹은 중앙정부)가, 힘을 몰아 쥔 똑똑한 리더가 정말 필요하냐고 물었던 소수파 혁명가, 아나키스트. 머리 좋은 자들로부터 체제를 위협하는 해충 취급을 받아 박멸당하거나, 철모르는 이상주의자로 조롱당했던 이 마음 따뜻한 자들이 던져놓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동안 유럽의 지성과 젊은이 사이에서 숙성돼가고 있었다.

특히 아나키즘은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에 힘  입어 다시 전성기를 찾은 듯 전 세계를 횡행한다. 폭로 사이트 위키리크스를 만들어 ‘밥맛 없는 자들의 뒤통수를 날려버린’ 줄리언 어산지와 다니엘 돔샤이트 베르크도 아나키스트를 자처한다. 최근 책을 펴낸 돔샤이트가 자기 인생의 평생 동반자로 꼽은 책이 ‘소유란 도둑질이다’라고 단언한, 아나키스트의 아버지 피에르 조제프 푸르동이 쓴 〈소유란 무엇인가〉이다. 사이버 세상을 주름 잡는 전 세계 유명 해커 중에는 아나키스트가 많다.

〈반란의 조짐〉보이지 않는 위원회 지음여름언덕 펴냄
아나키스트의 오래된 수법은 신비주의이다. 〈반란의 조짐〉 저자 역시 베일 뒤에 있다. 이 책은 2007년 프랑스 출판사 라파브리크가 ‘보이지 않는 위원회’ 이름으로 아주 소량 펴냈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되지 못했던 이 책은 익명의 번역자들에 의해 인터넷을 통해 여러 언어로 소개돼 나가면서 급속도로 퍼졌다. 2009년 미국에서 정식으로 영문판이 나오자 뉴욕에서는 독자가 자발적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미국의 대표적 ‘꼴통’ 논객 가운데 하나인 글렌 벡이 〈폭스 뉴스〉에 출연해 “내가 읽어본 책 중 가장 사악하다”라고 평해준 덕분에 진보 진영의 필독서로 떠올랐다.

익명으로 썼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내지른 ‘지라시’쯤 될 거라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150쪽이 조금 넘는 짧은 책 도처에서 지성과 통찰이 번뜩인다. 현란하게 비틀고, 뒤집고, 후려친다. 기지와 해학과 역설의 범벅이다. 요설을 참아가며 대충 한 번 훑고 두 번, 세 번 읽으면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점차 명료해진다.

번역자 성귀수씨에 따르면 이 책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자아·관계·노동·도시화·경제·환경·문명이라는 일곱 개 동심원을 그린다. 동심원은 ‘각각의 주제를 중심으로 공명의 파문을 이루며’  21세기의 지옥도를 보여준다.

〈반란의 조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대의정치의 장은 폐쇄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좌든 우든, 뚱뚱하든 홀쭉하든, 거물인 척하든 깨끗한 척하든 정치인은 허섭스레기에 불과하다. 파리 이주노동자 거주 지역의 어느 노인네도 이른바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연설보다 현명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나라 유력 정치인이란 사람들의 면면과 발언을 떠올리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얘기 아닌가. 〈반란의 조짐〉은 지금의 문명과 국가는 반복되는 경제 위기, 확산되는 실업, 갈수록 초대형화로 치닫는 환경 재앙을 막을 능력이 없다고 단언한다. “마침내 우리는 깨달았다. 경제가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경제 자체의 속성이 위기라는 걸. 일자리가 모자란 게 아니라 노동이 남아돌아간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는 위원회가 보기에는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모든 관계가 파괴되었다. 가족 모임 분위기는 식탁 한가운데 시체 한 구가 놓인 것 같고, 순수한 관계의 최후 보루인 연인 사이도 거짓과 소외의 법칙에 지배된 지 오래되었다.

국가 체제를 깨기 위해 코뮌 만들어 저항

대다수 노동자는 하이테크와 기계가 메울 수 없는 여러 구멍이나 때우는 존재로 전락했다.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빼앗기고 분위기 메이커 스펙을 쌓아야 직업을 유지하거나 취업할 수 있게 된 노동자들은 절망해 스스로를 대패질하는 목수나 다름없다. 팔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어 매춘부의 범절을 익혀야 한다. 유럽의 신세대는 회사에 대해 애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으므로 새삼 실망할 게 없다는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반란의 조짐〉에 따르면 취업 준비에 목매는 젊은이는 노동자가 되기도 전에 동원돼 스스로 착취당하는 서글픈 존재이다.

이 세상을 콘크리트와 유리로 뒤덮는 데 앞장섰던 앨 고어나 이명박 대통령 같은 이들이 갑자기 탈성장이나 녹색혁명을 주장하는 것에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혐오감을 드러낸다. 세상을 파괴하는 데 부모를 고용했던 자들이 다시 세상을 재건한답시고 자식을 동원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저 로고 하나를 살짝 바꾸는 최소한의 미봉책으로 현재를 고수하려는 이들에게 속지 말고 1989년 이래 유기농과 에너지 절약에서 눈부신 성과를 보이는 쿠바를 주목하자고 말한다. 세계를 정말 구하려면 그저 듣기 좋은 개량주의 방식이 아니라 미국의 경제 봉쇄 조처나 소련의 해체로 인한 원조의 갑작스러운 중단처럼, 쿠바가 당했던 것과 같은 충격을 세상에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국가 체제를 깨기 위해 폭력도 불사하는 코뮌을 만들어 저항하자고 주장할 정도로 과격하다.

반란의 조짐은 전 세계 곳곳에서 감지된다. 2001년 알제리 소요, 2005년 파리 방화, 2008년 그리스 폭동, 그리고 최근의 아랍 사태까지.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이 젊은 세대의 분노 앞에서 비틀댄다.

미국 뉴올리언스에 들이닥친 태풍 카트리나는 세계 최강국조차 ‘약자의 울타리’가 되는 데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어이없게도 뉴올리언스에서 지금 난민에게 식량과 취사, 의료 지원을 해주는 것은 개발업자에게 폐허를 팔아넘기려는 공권력이 아니라 아나키스트 조직이다. 일본 동북부 지진과 그에 따른 원전 사고는 세계 역사상 가장 섬세하게 짜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일본의 국가 조직 역시 ‘맹물’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따지고 보면 3년 전 봄에 터진 우리의 촛불시위도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자각이 불을 댕긴 것 아니었던가. 얼마 전 홍대 청소 용역 노동자 저항 때 우리가 목격한 것이 바로 코뮌들의 자생과 연대였다. 방사성 물질이 아니더라도 이 행성의 대기는 이미 충분히 불온하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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