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대하 역사소설을 가장 많이 쓴 작가는 누굴까. 내가 알기로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쓴 조정래씨이다(모두 합쳐 32권). 자료 조사하고 취재하는 데만 족히 몇 년이 걸리는 대하소설을 두 편도 아니고 세 편이나 연달아 쓴 분은 조 선생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긴 대하 역사소설을 쓴 작가는 누구일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쓴 일본의 야마오카 소하치 씨이다. 그는 1950년부터 1967년까지 무려 17년간 일본의 4개 일간지에 연재를 했다. 단행본은 모두 26권이고 자그마치 1억5000만 부나 팔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보면 일본의 전국시대를 종식할 가장 유력한 패자는 다케다 신켄이라는 무장이다. 그에 비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무래기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신켄과 정면으로 맞붙었다가 어찌나 혼이 났던지 말 잔등에 똥을 싸며 도망쳤다. 용 같고 범 같은 장수가 즐비한 다케다 신켄의 기병이 나타나면 일본 전국이 숨을 죽였다.

〈위키리크스〉다니엘 돔샤이트 베르크 지음지식갤러리 펴냄
다케다 신켄이 불의의 병을 얻어 죽고 나서 그의 무적 기병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날랜 말을 타고 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한 백전노장들은 오다 노부나가 진영으로 물밀 듯 짓쳐들었다가 농민 출신의 한 줌 조총부대에 의해 추풍낙엽이 되고 말았다. 그 뒤 전쟁터에서 중무장한 사무라이는 어쩐지 시대에 뒤처진 듯 보이게 되었다.

조총부대를 만난 사무라이와 그 사무라이의 운명을 그린 대하 역사소설 그 자체처럼 시대는 많은 것들을 폐기한다. IT 시대가 개막하면서 20세기에만 해도, 또 21세기 들어와서도 한참까지도 대단한 듯했던 많은 것들이 ‘마지막 사무라이’ 신세가 되어간다. 포드나 GM은 말할 것도 없고, 도요타나 소니마저도 오늘날처럼 빛을 잃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고 보면 삼성이나 현대의 앞날도 그리 밝지는 않다.

위키리크스를 둘러싼 거짓말과 헛소리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보이는 또 하나의 분야는 언론이다. 언론이라기보다는 신문이나 잡지 혹은 방송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전 세계 도시의 요충지마다 거대한 빌딩을 차지하고 진짜 권력에 지지 않는 권세를 휘둘러왔던 이 거인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줄 착각하지만 발밑이 허전하다.

여론 주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믿는 20세기형 언론의 발판을 흔들어대는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오스트레일리아인이다. 선정적인 자동차 전문 잡지를 만들어 돈을 번 뒤 유럽과 미국으로 진출해 굴지의 권위지들을 대형 마트에서 쇼핑하듯 사들이는 루퍼트 머독. 그는 적자를 내면서도 만화나 사진 싣기를 꺼리는 꼬장꼬장한 권위지 기자들을 마음껏 비웃으며 이익을 내지 못하는 언론사는 존재 가치가 없다고 윽박지른다. 그가 휘젓고 다니는 통에 유럽과 미국에서 여성의 벗은 몸을 싣지 않는 언론을 점점 찾기 힘들어진다.

결정적으로 거인의 무릎에 도끼질을 해대는 이는 이제 겨우 40줄에 접어든 또 다른 오스트레일리아인 줄리언 어산지이다. 전 세계의 친구 집을 떠도는 이 주거 부정의 전직 해커가 만든 폭로 사이트는 3년 동안 미국이 자랑하는 특종 제조기인 〈워싱턴 포스트〉가 지난 30년간 했던 것보다 더 많은 특종을 해버렸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특종거리를 서버에 쌓아둔 상태이다.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CIA는 정신없이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이 정체불명의 사이트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이 사이트의 2인자가 어산지와 불화해 떨어져 나와 책을 쓰기 전까지는.

서른두 살의 전직 컴퓨터 프로그래머 다니엘 돔샤이트 베르크가 쓴 〈위키리크스〉(지식갤러리, 2011년)는 숨 막혔다. 워낙 컴퓨터하곤 친하지 않아 겁을 먹었지만, 저자가 기자 못지않게 얘기를 쉽게 풀어가는 힘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돔샤이트 베르크에 따르면 위키리크스는 운영자·관리자·대변인이지 결코 지하조직의 전투원이 아니다. 자료를 기다릴 뿐 자료를 요구하거나 직접 해킹하지 않으며 어떤 지령도 내리지 않는다. 미국을 싫어하는 국가의 정보기관이나 거대 조직이 뒤에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지만 말짱 헛소리이다. 어산지와 돔샤이트 베르크는 기자들에게 위키리크스를 돕는 자원봉사자가 수천명이라고 연막을 쳤으나 거짓말이었다. 위키리크스를 움직인 실질 인원은 극소수였다. 상당히 오랜 기간 고물 서버로 버텼을 만큼 장비나 보안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의 얘기를 어떻게 다 믿을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의 책에는 믿고 싶게 만드는 진정성이 넘쳐난다.

ⓒ한성원 그림
어산지, 오너 행세하고 싶어해

극단으로 자유롭고 에너지가 넘치는 천재 어산지와 꼼꼼하고 성실하고 합리적인 독일 청년 돔샤이트 베르크는 처음에는 죽이 잘 맞았다. 그들은 거대한 변호사 조직을 거느리고 기성 언론을 찍어 누르는 은행, 사이비 종교, 제약회사의 비리를 낱낱이 공개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재수 없는 놈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날려버린 것이다. 수십억에 달하는 돈을 은밀히 처리하는 영리한 자들과 더러운 거래를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데는 선수인 자들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들은 협박, 원망, 뇌물 수수 유혹을 하는 모든 이메일까지 다 공개해버리는 위키리크스의 투명성에 어쩔 줄 몰라했다. 제보자를 색출하려고 혈안이었으나 그마저 성공한 예가 거의 없었다. 그는 그때의 행복감을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솔직히 고백한다.

기성 언론이 다루지 못했던 성역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이 21세기의 혁명가들은 불행하게도 20세기의 성공적인 혁명가들처럼 권력을 잡은 뒤에 불화한다. 어산지는 한국의 재벌 총수처럼 오너 행세를 하고 싶어했다. 그는 돔샤이트 베르크를 비롯한 위키리크스의 핵심 멤버와 함께 의논해 의사 결정하기를 점점 싫어했다.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 문제 제기를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틈만 나면 위키리크스의 정보를 출처도 표기하지 않고 훔쳐가는 기성 언론과 어산지는 타협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 〈가디언〉 〈슈피겔〉을 비롯한 몇몇 권위지들을 파트너로 선정하고 미국의 외교문서 25만 건을 비롯한 중요 정보를 공유했다. 돔샤이트 베르크에 따르면 특종을 빼앗길 위험이 있으면 뼈다귀를 지키려는 개처럼 으르렁대는 기자들은 어산지가 나눠준 정보를 입맛대로 찢어발기거나 협력사에게 먹잇감으로 다시 나눠주는 실정이다. 어산지에게 반기를 든 돔샤이트 베르크를 비롯한 이탈자들은 오픈리크스라는 새로운 폭로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사이트는 모든 것을 공개한다는 위키리크스 본래의 원칙을 지킬 것이라고 한다. 불화와 갈등에 치가 떨렸던 이들은 끝까지 의견 조율이 안 될 경우 가위바위보로 정한다는 ‘기발한’ 해결책도 갖고 있다. 이들은 제보자가 원하는 언론사에 먼저 정보를 제공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공개할 예정이다. 위키리크스가 됐건, 오픈리크스가 됐건 폭로 사이트가 주는 정보를 받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기성 언론이 처한 불편한 현실이다. 25년 넘은 나의 기자 경력이 녹슨 갑옷만 같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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