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지방선거 패배 이후 혼란에 빠진 열린우리당 의원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책이 있다.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다. 언어의 프레임이 어떻게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지를 그는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했다. 공화당이 ‘세금 구제’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민주당을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나쁜 정부’로 만들고, 이를 혁파하겠다고 나선 조지 부시 후보는 ‘착한 후보’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부동산 관련 세금과 관련해 한나라당이 ‘세금 폭탄’이라는 말로 공격했던 것을 상기하며 이 책을 뼈저리게 읽었다. 그러나 충분히 교훈을 얻지 못한 채 한나라당이 새로 만들어낸 ‘잃어버린 10년’에 대선에서마저 무릎을 꿇어야 했다.

분명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규정한다. 언어 소통 과정에서 듣는 사람은 그 언어 속에 담긴 전제를 받아들이게 되고, 쓰는 사람은 그 언어를 통해 무의식의 일단을 드러낸다. 이와 관련해서 요즘 기자들이 자주 쓰는 표현 중에 주목할 만한 단어는 ‘좌시하지 않겠다’와 ‘진노했다’이다.

‘좌시하지 않겠다’는 표현은 박근혜 전 대표와 관련해서 자주 등장한다. 공천 시기를 놓고 시작된 박 전 대표와 이명박 당선자 간의 갈등은 ‘물갈이 공천’ 이야기가 나오면서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박 전 대표의 육성으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말과 이를 풀어낸 ‘앉아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박 전 대표가 처한 위태로움이 이 단어에 그대로 녹아났다.

‘좌시하지 않겠다’와 비교되는 이명박 당선자를 둘러싼 말은 ‘진노하다’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인수위 보고 사항이 누출된 것에 대한 당선자의 반응을 묘사하며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노하다’는 표현은 ‘존엄한 존재가 크게 노하다’는 뜻이다. 이 당선자는 말 속에서도 이미 존귀해져 있었다. 비슷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주로 쓰였던 표현은 ‘격노했다’라는 말이었다.

이명박 당선자를 존귀한 존재로 여기는 기자들이 남발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격의 없이’라는 표현이다. 대기업 총수들을 만날 때도 당선자는 ‘격의 없이’ 만났고,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날 때도 ‘격의 없이’ 만났다. 국가경쟁력강화특위 데이비드 엘든 위원장과 만났을 때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고, 전국 상의 회장단과 만났을 때도 역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기사에 따르면, 누구를 만나든 당선자는 ‘격의 없이’ 만났다. 후보 시절 이 당선자의 말실수를 잡아내는 데 혈안이었던 기자들은 이제 그의 가벼운 언행을 ‘격의 없는 행동’이라 칭송한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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