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삶과 희망을 담은 그림에 취하다
  • 이현우 (문화 평론가)
  • 호수 17
  • 승인 2008.01.0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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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러시아 미술에 취해서 쓴 취중록이자 러시아 미술로의 뿌리치기 어려운 초대장이다.
   
  러시아 미술사
이진숙 씀/ 민음인 펴냄
 
 
“러시아에도 미술이 있어?” <러시아 미술사> 저자 이진숙씨가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보인 일치된 반응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에 발레와 음악은 있지만(곧 볼쇼이 발레와 차이코프스키는 있지만), 어인 미술인가라는 반응이었겠다. 이번에 나온 <러시아 미술사>는 저자가 러시아에서 러시아 그림들을 보고 받은 ‘충격’을 적어놓은 보고서이자, 러시아 미술에 흠뻑 취해 늘어놓은 취중록(醉中錄)이다.

흔히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시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동시대 시인 츄체프의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인데, 저자가 러시아 미술 세계에 대한 길잡이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민속학자 르보프의 말이다. “우리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격렬한 삶이 있다.” 어째서 격렬한가? 러시아 역사 자체가 격렬했기 때문이다. 이 ‘격렬한 삶’과 무관한 미술, 오직 미술만을 위한 미술은 러시아 미술이 아니었다.

저자는 러시아 중세의 이콘화(종교·신화 및 그 밖의 관념 체계상 어떤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미술 양식)에서부터, 소비에트 시기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이후의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미술사 전체를 여섯 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이 중 러시아 미술만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시 이콘화와 19세기 이동파,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등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특히 19세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건 이 그림들의 일부가 최근 몇몇 아방가르드 작품과 더불어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서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 이동파 화가 일리야 레핀의 작품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1873).  
 
‘이동파’란 민중에게 예술작품을 직접 감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여러 도시를 옮겨다니며 전시회를 열고자 했던 유파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파 화가들은 러시아 미술의 인텔리겐치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동파의 가장 대표 화가는 요즘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고 있는 일리야 레핀이다.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1873)은 그의 대표작으로, 배를 끄는 인물들의 절망과 다양한 표정을 포착한 이 그림은 러시아 미술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는 이 그림의 에스키스(초벌 그림)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과 함께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1872)으로도 유명한 화가 바실리 페로프의 ‘트로이카’(1866)이다. 몇 년 전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인데, 추운 겨울날 물동이를 나르는 세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들의 팍팍한 삶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표정은 의외로 어둡지 않다. 저자는 이 그림에 대해서 “지금 그들은 행복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절망 속에서도 어린 소년 같은 순수한 마음과 러시아적인 어떤 것에서 끊임없이 희망을 부여했듯이 말이다”라고 적었다. 

   
  바실리 페로프의 <트로이카>(1866).  
 
그러한 희망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직접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니콜라이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1888)에서도 읽을 수 있다. 죄수 호송 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잠시 정차한 사이에 창살 너머로 비둘기들이 모이를 먹는 걸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비록 러시아 미술이 이 몇몇 그림만으로 포괄될 수는 없지만 러시아 미술의 메시지만은 확인 가능하다. 그것은 삶의 고통과 분노, 비애와 절망에 대한 연민이면서 그럼에도 끝까지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송가이다. 
 
참고로, 국내에는 러시아 미술사를 통시적으로 다룬 조토프의 <러시아 미술사>(1996, 동문선), 아방가르드 미술사를 담은 캐밀러 그레이의 <위대한 실험>(2001, 시공사), 그리고 최초로 국내 필자가 쓴 현장감 있는 러시아 미술관 안내서인 이주헌의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2006, 학고재)이 출간돼 있다. 이진숙의 책은 이 모두를 종합한 가장 이상적인, 러시아 미술사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러시아 미술로의 뿌리치기 어려운 초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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