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러나 추억에는 함정이 있다. 그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과거의 고통은 잊혀지고 가려지고 왜곡되기 십상이다. 과거에 대한 막연한 기억이 현재의 현실을 부정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을 우리는 왕왕 볼 수 있다.

조선일보 2007년 12월28일자 사설에서 그 ‘추억의 함정’을 볼 수 있었다. ‘싹쓸이 문화 권력 씻어내 문화 다양성 되찾아야’라는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노무현 정부 수립 이후 문화계의 급격한 권력 이동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다. 

처음 문제 삼은 것은 민족음악인협회 김철호 전 이사장이 국악원장으로 취임한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 스승과 제자 간에 장유유서의 질서를 깨뜨린 ‘문화 쿠데타’라고 비난했다. 조선일보는 이 쿠데타의 점령군 사령관으로 명계남·문성근씨를 지목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진보적인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계열 출신이 보수적인 예술단체총연합(예총) 출신을 제치고 문예진흥원장·국립현대미술관장·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등 요직을 독점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조선일보는 정연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이 KBS 사장에 임명된 것이나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출신 세 사람이 방송위원회 위원에 임명된 것, 그리고 KBS 이사회나 MBC 최대 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 또는 한국언론재단 등이 노무현 정부와 코드가 맞는 인사들로 꾸려진 것을 지적하고 비난했다.

이런 비판과 비난을 쏟아내면서도 조선일보는 국악계에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친일 국악인의 후예들이 국악계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이나 각종 비리 의혹으로 얼룩진 예총이 목동 예술인회관을 몇 년째 방치하는 등 문제를 지적받는 이익단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자체가 문화 권력의 축으로 비난 대상이었다는 점도 역시 빼놓았다.

사람들 중에는 조선일보가 문화 권력의 축으로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시절을 아름답지 않게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일보는 문화 권력을 탈취한 좌파 진영에서 소설다운 소설, 시다운 시를 별로 내놓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다운 소설, 시다운 시를 쓰지 못한 작가들이 각종 감투를 쓰고 문화판에서 행세하는 시절을 오랫동안 겪어왔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판 새판짜기에 대한 조선일보의 이 주문서가 두려운 이유는 ‘공존의 모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사설은 ‘싹쓸이’를 또 다른 ‘싹쓸이’로, ‘문화 쿠데타’를 ‘문화 반정’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일보의 주장이 마법처럼 곧바로 정부 정책이 되었던 시절을 우리는 경험했다. 이명박 정부도 조선일보의 지령을 그대로 따르는지, 조선일보의 마법이 이번에도 통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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