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별신굿 음악의 대가인 김석출(1922~2005) 스타일의 타악에 매료된 외국인은 사이먼 바커가 처음이 아니다. 굿판에서 뼈가 좀 굵은 연구가들이라면 사이먼 밀스를 기억할 것이다. 영국 출신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첼리스트인 밀스는 1997년 런던을 방문한 김석출의 굿장단에 매료되었고, 대학에서 틈틈이 사물놀이를 배웠다. 대학원생 신분이던 2000년 아예 짐을 싸들고 내한해 6개월 이상 체류하면서 김석출에게서 푸너리 장단을 배웠다. 마치 김석출 일행인 듯 동해안 일대의 굿판을 헤집고 다닌 밀스는 별신굿에 대해 상당히 해박했으며, 제마수·청보·쪼시개·덩덕궁이를 줄줄이 설명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밀스가 잊힌 것은 바커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클래식 전공을 포기하고 런던 대학원에서 한국음악을 전공하던 재즈 마니아 밀스는 재즈나 다른 음악적 프로세스를 통해 굿음악을 녹여낼 가능성이 많았음에도 그는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 영국 전통악기 백파이프에도 뛰어난 소질을 지녔던 밀스는 “전통음악은 그 자리에서 감상할 때 가장 아름다우며, 전통악기 그 자체를 존중할 줄 알아야 음악이 음악다워진다. 음악을 섞는 것은 오만한 짓이다”라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글로 무속 음악을 기록했고, 이를 영국에 소개했다. 

엠마 프란츠가 찍은 '탱큐, 마스터 킴'에는 외국인과 국악의 뜻깊은 만남이 잘 담겨 있다.
우리 국악의 매력을 소개하려고 애쓴 외국인은 이 밖에도 많았다. 임방울(1904~1961·판소리 명창)이 타계하자 그를 ‘드물고 유일한 꽃’이라며, 국악 천시 풍조가 강한 한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기고문을 작성한 이는 바로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 앨런 헤이먼이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헤이먼은 한국전쟁 중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임방울 판소리 음반을 듣고는 매료돼 국악에 빠졌다. 1957년 미국으로 일시 귀환했다가 1959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헤이먼은 임방울에게서 판소리를 배웠으며, 시조·민요·기악 등에도 출중한 솜씨를 보였다. ‘국악예술학교 첫 외국인 강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헤이먼은 이후 명지대·홍익대 영어강사로 있으면서 한국인과 결혼해 해의만(海義滿)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갖기도 했다.

헤이먼은 한국 국악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 여럿을 세웠다. 미주아시아협회를 통해 국악단의 미국 공연을 주선했고, 그 덕에 1964년 삼천리가무단이 뉴욕 링컨센터에서 역사적인 공연을 하게 되었다. 삼천리가무단의 성공은 아리랑가무단 창설로 이어졌고, 이듬해 아리랑가무단은 구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한국 전통음악의 해외 공연 물꼬를 텄다. 1964년 헤이먼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 민속학자 존 리비가 한국을 방문해 김소희·김옥심 등 당대 최고 명창의 소리를 녹음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판소리를 ‘호머의 서사시 한국판’이라 극찬

CEO이던 게러스 드 브룬은 한국 전통음악의 상품화 가능성을 믿고 이를 실행에 옮긴 이방인이었다. 한국 언론인과의 친분으로 국악을 접한 뒤 특히 정악의 묘음에 매료된 브룬은 아일랜드 클라다 레코드 사장이었으며, 1976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황병기·김옥심·안향련·이은관과 교류하고 그들의 소리를 녹음했다.

국악이 변방의 음악에서 세계 무대에 당당히 합류하게 된 데에는 아렌 호바네스 부부의 역할이 컸다. 한국 음악의 흐름을 ‘베토벤 말기 현악4중주곡’에 비유하기도 했던 호바네스는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했으며,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일본에 체류하면서 동양음악을 연구하던 중에 1963년 한국을 찾게 된다. 피리 명인 김태섭에게서 피리를 사사한 그는 아악에 관심을 보였고, 특히 이주환의 정가를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겠다”라고 말했다. 판소리를 ‘호머의 서사시 한국판’이라고 표현하고, 아악을 ‘세계에서 가장 표출적이고 숭엄하면서도 자유스러운 음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가 작곡한 ‘가야금과 서양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제16번’은 국악기와 서양악기를 접목한 첫 외국 작곡가의 작품이다. 그의 부인 역시 김천흥에게 해금을 사사한 피아니스트로 하와이 ‘할라함 무용 연구소장’인 교포 할라함의 무용곡을 작곡하면서 전통음악에 빠져, 남편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기악을 배우게 된 것이 결국 아렌 호바네스의 방문과 ‘교향곡 제16번’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새 당악 ‘무궁화’와 ‘타령’, ‘영산회상’을 작곡한 루 해리슨 역시 한국과 전통음악을 전세계에 알린 대표 음악가이다. 미국 현대음악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그는 한국방송협회(KBC)에서 제작한 음반 〈한국아악〉에 매료되었고, 1961년 동남아 방문을 갑작스레 취소하고 한국행을 택했다. 국악원에서 아악을 두 달간 배운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만든 곡이 ‘무궁화’이다.

한국음악을 널리 알린 푸른 눈의 선각자들 덕에 이제 국악과 서양음악의 합주가 흔해졌다.
수십 년 동안 파란 눈의 이방인들은 한국 전통음악을 인생 전환의 계기로 삼았고, 자신들이 구축한 오리엔털리즘을 극복하며 그 자리를 한국음악으로 채웠다. 그리고 그 음악이 세계의 주류 음악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향성을 지향해야 할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 같은 이방인들의 여정은 잠시 주춤하다가 사이먼 바커를 계기로 다시 활성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조차 등한시하는 전통음악의 참가치를 제대로 향유하는 이방인이 우리 음악을 자신의 음악에 녹여내 연주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기자명 김문성 (국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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