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0일 박재범 팬들은 공개편지 한 통을 받았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여러분의 많은 응원과 사랑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내 고마운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내가 여기까지 온 게 여러분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거예요.” 박재범이 쓴 것이었다.

지난해 9월 ‘한국 비하 발언 파문’을 일으키고 미국으로 간 박재범이 9개월 만인 6월18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쫓기듯 떠났지만 돌아오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공항에는 2000명이 넘는 팬이 운집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었다. 비난 일변도였던 지난해 보도와 달리 그의 이른 재기에 주목하는 보도가 많았다.  

ⓒ뉴시스박재범(위)은 8월7일 〈2010 써머위크앤티〉 행사를 통해 건재를 과시했다.
음원과 음반 판매 실적도 고무적이다. 음원은 공개할 때마다 각종 음원 차트를 석권했다. 싱글앨범도 제법 많이 팔렸다. 트위터 팔로어는 두 달여 만에 11만명을 넘어섰고, 유튜브 구독자도 12만명이 넘는다. 음반업계에서는 ‘박재범 효과’라는 말이 생겨났다. 방송 출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정도 성과를 올린 것은 이례적이다.

미국 시애틀 고향집에 ‘위리안치’ 되어 있던 박재범이 어떻게 이 같은 기적을 만들어낸 것일까? JYP엔터테인먼트에서 방출된 뒤에는 기획사에도 속하지 않고 주류 미디어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던 그에게 이런 뜨거운 팬덤이 찾아온 비결이 무얼까? 도대체 그가 떠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일단 그를 버리지 않는 팬이 있었다. ‘믿음을 갖는 것은 날개를 갖는 것과 같다’는 격언을 공유하는 그의 팬들은 굳센 ‘모성애’로 무장한 팬이었다. 주로 30~40대로 구성된 이들은 스스로를 ‘할매미’라고도 부르는데, 단순히 스타를 선망하는 종속적인 팬덤이 아니라 나이 어린 스타를 지켜주는 보호막 구실을 하는 성숙한 팬덤을 보여주었다.

모성애로 무장한 ‘억척 어멈’들 맹활약

더 중요한 것은 그 팬들을 연결하는 신경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신경망이 국내선뿐 아니라 국제선까지 뻗쳐 있었다는 사실이다. TGIF(트위터·구글·아이폰·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로 연결된 국내외 팬이었다. 그들은 박재범이 미국으로 ‘귀양’ 가는 순간부터 복귀하는 때까지 SNS로 소통하며 그의 부활을 이끌어냈다. 대중문화 평론가 강명석씨는 “유튜브가 팬과 박재범 사이에 오작교가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SNS가 그의 부활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SNS는 그를 어둠의 터널에 들어가게 만들었지만 그 터널 밖으로 나오게도 만들었다. 문제가 된 글은 그가 연습생 시절이던 2004년 자신의 마이스페이스 페이지에 올린 “Korea is gay(한국이 역겹다)”라는 글이었다(당시 그는 만 17세였다). 병역 약속을 어긴 유승준 이후 교포 연예인에 대한 반감이 있던 터라 이 문장은 확대 해석되었다.

2009년 9월5일은 박재범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이날 그의 발언과 관련해 무려 700여개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왔다. 비난 일색이었다. 아고라 사이버 청원에는 ‘자살해야 한다’ ‘사지를 절단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올라왔다. 팬들도 움츠러들었다. 그의 팬 윤소영씨는 “이때부터 팬들이 ‘일코’ 자세로 바짝 엎드렸다. ‘일코’란 일반인 코스튬플레이의 줄임말로, 팬인데 일반인인 척했다는 뜻이다. 막무가내식 비난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 2월25일 박재범은 두 번째 죽임을 당했다. 소속사는 그에 대한 영구 퇴출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3월부터 박재범군의 2PM 컴백을 준비했으나 작년 12월22일 박재범군이 사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고백해왔다. 이 문제의 내용은 작년 9월 팀 탈퇴 시의 문제보다도 훨씬 더 안 좋고, 또 사회적으로도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워싱턴 주 에드몬드에서 태어나 시애틀에서 자란 교포 3세, 비보이 재능이 탁월해 JYP엔터테인먼트에 발탁되어 그룹 2PM의 리더를 맡았던 박재범에게 이날은 최악의 날이었다. 비보이 재능 외에 노래와 랩도 익히고 후배들을 잘 다독여 ‘관리직’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한 이 착실했던 청년은 ‘국제 쓰레기’가 되었다. 시애틀 고향으로 귀양 온 그에게 현지 언론까지 호기심 가득한 카메라를 들이댔다.

시작은 이때부터였다. 그의 팬인 ‘억척 어멈’들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들이 세를 규합한 곳은 구글 유튜브 사이트였다. 팬들은 유튜브에서 댓글 전쟁을 벌였다. 박재범 관련 동영상에 악플(악성 댓글)이 올라오면 스팸 신고를 해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선플(칭찬하는 댓글)’을 올리며 사이버 여론전을 펼쳤다.

ⓒ뉴시스공항에서 박재범 귀국을 기다리던 팬들. 이들은 해외 팬과의 소통을 통해 박재범을 부활시켰다.
일단 명예 회복이 시급했다. 팬들은 다시 박재범의 마이스페이스 계정을 뒤져 2005년 6월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대해서 알고 싶다’라고 올린 글을 찾아내고, 2006년 10월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제이가 아니라 박재범으로 불리길 원한다’라고 올린 글을 발굴해낸다. 이런 내용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며 회복을 도모했다.  

여론전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선행도 많이 베풀었다. 아이티 지진에 1870만원을 기부하고 박재범 이름으로 4명의 아이에게 후원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기부 봉사활동을 하는데, 네이버 해피빈(약 7000만원) 등 온라인 성금으로 모은 것만 1억원이 넘는다. 이 외에도 그동안 10여 차례 이상 기부 행사를 가졌다. 

이 같은 활동을 하면서 팬들은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도 이런 일을 하는 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로 유튜브 게시판에서 만났는데, 외국 팬들과 좀 더 체계적인 소통을 하기 위해 팬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를 활용했다. SNS가 익숙한 해외 팬이 방법을 일러주었고 그것을 매뉴얼화해서 돌려 읽었다.

해외 팬들이 서로 소통하며 이벤트 기획

트위터 이용 등에 대한 매뉴얼 문서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접속해 함께 문서 작업을 할 수 있는 클라우드 컴퓨팅 프로그램인 구글독스를 활용해 만들었다. 그렇게 TGIF 서비스를 하나하나 익혀가면서 팬덤의 글로벌네트워크(Jaywalkers)가 만들어졌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는 구글 번역기를 활용해 소통했다.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일단 속보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박재범 관련 소식이 언론에 나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체계가 형성되었다. 박재범 주변 지역에 사는 미국 팬들이 그의 근황을 올리면 각국의 소식통들이 그 글을 자국 언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 글을 각국 팬사이트에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정보를 공유했다. 파라과이의 시골 소녀부터 미스 타이 출신의 모델까지 30개 국가 이상의 곳에서 팬들이 움직였다.

TGIF를 활용하면서 ‘깨어 있는 팬의 조직된 힘’이 발현되어 언론 보도 없이도 박재범 소식은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소통이 되자 이벤트가 기획되었다. 한 말레이시아 소녀 팬이 응원 플래시몹을 제안하자 전 세계 팬들이 화답했다. 박재범을 응원하는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내용은 다양했다. 단순한 응원 메시지에서부터 2PM 시절 안무를 흉내낸 것, 혹은 그의 퇴출을 안타까워하는 의미로 1시59분에 시간을 멈추는 것 등 다양한 영상이 올라왔다. 미국 팬들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그의 누명을 벗겨주었고, 한 프랑스 팬은 한국인들을 상대로 “박재범도 사람이다. 그에게 음악을 허락하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박재범이라는 코드를 통해 하나의 온라인 생태계가 구축되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20일째인 2009년 9월28일 흥미로운 이벤트가 열렸다. 그에게 힘을 실어줄 만한 응원 문구가 쓰인 ‘공중 배너’를 비행기에 매달아 그가 사는 집 근처에 비행시킨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팬 브라이어 프란시스(19)가 제안한 이벤트였는데 미국·한국 등 총 18개 국가 팬이 참여했다.

‘공중 배너’ 이벤트에 필요한 비용 2500달러는 모금으로 충당했다. ‘힘을 내라’는 직접적인 표현보다 좀 더 위트를 곁들인 표현인 “J. What time is it now?”라는 문구를 써서 2시간 동안 박재범의 집 상공에서 날게 했고 지인을 통해 이를 통보했다.

박재범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던 올해 4월25일에는 대규모 온라인 이벤트를 벌였다. 특정 시간에 트위터에 ‘#happy23jaypark’라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올려서 트랜딩 토픽(실시간 이슈)에 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오르면 전 세계 이용자들의 트위터 화면에 이 단어가 뜨게 되어 광고가 된다. 이날 트랜딩 토픽에서 오스카상을 밀어내고 2위를 차지했는데, 영국의 인디펜던트 지는 이를 기사에 올리기도 했다. 이후 전 세계 박재범 팬들은 트위터 트랜딩 토픽을 마치 전용 광고판처럼 활용했다. 그에게 주요 일정이 있을 때마다 이슈에 오르게 했다.

팬들이 활용한 트위터와 유튜브를 박재범도 직접 활용했다. 2월24일 개설한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가 12만명이 넘는다. 유튜브 최고 인기스타인 조너스 브러더스(약 80만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전설적인 밴드 메탈리카(13만명)와 맞먹는다. 그가 화장실에서 녹화한 〈Nothing on You〉는 이틀 동안 200만명이 조회했다. 5월18일 개설한 트위터 팔로어도 11만명을 넘어섰다. 이 수치는 국내 최고 수준이다.

박재범은 이제 아무런 도움 없이도 영상을 내보낼 수 있는 방송사(유튜브)와 이를 전달할 송신소(트위터)를 확보한 가수가 되었다. 국내 연예인 중 가장 TGIF에 능숙한 타블로(트위터 12만명, 유튜브 2만명)와 비슷한 수준으로 음반계에서는 가수 비가 10년에 걸쳐 이뤘던 것을 박재범이 1년도 안 되어 이뤘다고 평가한다. 

트위터로 박재범 팬의 사진을 모은다는 글을 올리자 전 세계 팬들이 활동 사진을 보내주었다.

6월18일, 박재범이 귀국하면서 그동안 구축해놓은 글로벌 네트워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귀국 이후로는 국내 팬클럽인 ‘언더그라운드’가 주도권을 잡고 움직였다. 그동안 해외 팬이 주는 정보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올리던 이민아씨(32)는 공항 입국 장면을 트위터로 생중계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각국 언어로 퍼져나갔다. 집에 와보니 팔로어 수가 1000명 이상 늘어 있었다”라고 말했다.

박재범의 귀국을 기점으로 팬들은 ‘일코’를 끝내고 그의 자랑스러운 팬임을 밝히기 시작했다. ‘재범이 남팬(남자팬)’이라는 글자를 이마에 써 붙이고 공항에 나간 문창열씨(22)는 “대학교 기말시험을 제치고 나갔다. 박재범에게 남성 팬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그가 욕을 덜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한국 팬들이 팬덤의 중심에 서면서 해외 팬들 사이에서 한글에 대한 관심과 한국에 대한 관심이 고취되었다. 최순주씨(40)는 “귀국 이후 외국 팬들도 트위터에 글을 쓸 때 ‘범모닝’ ‘범나잇’ 등 한글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박재범에 대한 관심이 한국과 한국 문화, 그리고 한국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드렁큰타이거JK 브라질팬클럽 대표가 박재범 팬클럽 활동을 주도하고 있 는데, SNS가 문화 실크로드가 된 셈이다.

‘문화 실크로드’가 된 SNS

귀국 이후 ‘박재범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팝스타 B.O.B의 히트곡 〈Nothing On You〉를 번안한 신곡 〈믿어줄래(Count on me)〉는 7개 주요 디지털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벨소리·컬러링·앨범 판매 등 음원 수익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인 2PM·원더걸스·2AM을 능가하는 수치였다. 〈울고 싶단 말야〉 〈Doin' Good〉 등 후속 곡도 연달아 히트했다.

해외 팬도 거들었다. 국내 팬은 이들이 국내 음원을 구매할 수 있도록 계정을 만드는 방법을 매뉴얼로 만들어 전달했다. 계정을 만드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페이팔(인터넷 결제 서비스) 계정을 통해 대신 구매해주는 방법도 활용했다. 안티 팬들이 불법 디지털 음원을 유통시키는 것도 함께 파악했다.  

지난 8월7일 박재범은 〈2010 썸머위크앤티〉 페스티벌 무대에서 드디어 복귀 공연을 가졌다. 이날 그는 “오랜만에 무대에 서니 기분이 좋다. 준비할 시간이 많이 없어 부족했는데 다음에는 더 좋은 무대로 돌아오겠다”라고 말했다. 그의 다음 무대는 8월28일과 29일 고려대학교 화정체육관에서 열리는 팬미팅 행사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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