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한나라당의 차명진 의원은 엑스맨이었던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를 포함해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최저생계비라든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라든가, 복지예산이라든가 하는 문제에 급관심을 갖게 되었을 리 만무하다. 또 정부·여당과 그들의 복지예산 편성 및 운영에 공분을 터뜨리기도 쉽지 않았을 터이다. 이 정권은 정말, 국민의 화를 돋우며 공부시키기 위해서라면 못하는 게 없다.

개인적으로는 버스요금이 70원인 줄 아셨던 그분이 최저생계비 1일 체험에 참가하지 않은 게 좀 아쉬웠다. 좀 더 큰 활약을 하셨을 텐데. 정부의 복지 부처 관료들, 지역의 관련 공무원들, 그리고 관련 법안을 입안하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소속 인사들이 이 ‘체험’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건 언급하기도 싫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이 어떤 식으로 법안을 개정하거나 예산을 편성할지 너무 뻔히 보여서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단 하루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의 직업적 소임과 관련된. 단 하루인데, 단식인들 못하겠으며, 18시간 노동인들 못하겠고, 가지 못할 곳, 하지 못할 일이 또 뭐 그리 특별히 있겠나. 우리의 엑스맨께서도 어쩌면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했고, 소중한 추억 한 가지를 자랑하려는 순진한 마음으로 ‘황제의 밥상’을 언급했다가 크게 경을 친 것인지도 모른다. 혹시, 그동안 차명진 의원 같은 사람이 복지예산을 책정하고 편성하는 데 목소리를 높여왔던 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내가 해봐서 아는데” 아니던가!

어쨌든 문제는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짧은 체험에 불과한 일이 또 누군가에겐 남은 생애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가난, 그것도 극빈 상태가 한 달, 일 년을 넘어 남은 생애 전체에 걸쳐 지속될 때, 그리고 개선 가능성이 희박할 때, 삶은 바로 지옥이 된다.


그러므로 복지예산을 책정하고 분배하는 일은 산술적 평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지속 가능한 현실적 삶에 근거해야만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경제가 나빠질수록 복지예산은 증가해야 맞다. 기존 수혜자들에 더해서 실업과 파산, 경제 위축으로 인한 수입 감소로 실질적으로 이 제도의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미국의 ‘푸드 스탬프’(Food Stamp: 시민, 영주권자, 난민 중에서 일정한 가계소득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를 대상으로 발급하는 일종의 현금카드. 식재료와 음식을 구입할 수 있다)는 최근 1~2년 동안의 경제 침체로 그 사용층이 상당수 확대되었고, 당연히 예산 투여도 늘었다. 물론 미국은 동방예의지국이 아니기 때문에 ‘부양 의무’ 따위를 혜택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누구에게는 하루 체험이 누구에게는 평생의 지옥

‘예산의 한계’라는 말은 의역하면 “그거 하기 싫거든!”이다. 그 때문에 복지는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자주 지적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촉발이 얼마나 제도화에 기여할지는 알 수 없다. 복지는 예산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자국의 국민, 즉 세금을 내서 국가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사람에게 당연히 제공해야만 하는 ‘의무 서비스’이다. 엑스맨 차명진 의원과 같은 당 소속으로 역시 1일 체험에 참가한 공성진 의원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고 한다. “국가가 개인의 영역에 관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국가는 법을 다루는 것이지 인정을 다루는 곳이 아니다.” 나는 이런 유의 발언이 더 끔찍하다. 가난을 사적 영역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무지 혹은 무시. 그리고 정부와 여당이 자기 책무를 방기하는 데 법과 인정을 동원하는 것. 좋다. 당신들 말마따나 ‘법대로’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해라.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비용’답게 말이다.

기자명 권용선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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