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 의료보장 체계인 국민건강보험 제도의 미래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의 양대 세력이 충돌할 조짐이다. 정부·여당은 국민건강보험 체계를 약화시킬 위험을 감수하며 이른바 ‘의료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반해 복지 전문 연구·운동 단체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은 국민건강보험을 더욱 강화하는 의제를 제시하면서 관련 운동을 본격화할 조짐이다.

정부·여당은 시민사회의 ‘의료 민영화 반대’를 ‘괴담’ 취급하며 “건강보험 민영화는 없다”라고 맞서왔다. 이 같은 이명박 정부의 ‘발언’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정부·여당이 현 국민건강보험 시스템의 핵심인 ‘건강보험(공단)’을 민간 사업자에게 매각해서 ‘민영화’할 조짐은 전혀 없다. 정부가 직접 나서 당연지정제(국내 모든 의료기관이 의무적으로 국민건강보험 가입자를 고객으로 받아야 하는 제도)를 폐지할 기미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건강보험공단 민영화’ ‘당연지정제 폐지’ 이외에도 ‘의료 민영(영리)화’를 실질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지난 4월6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의료법일부개정법률안(개정안)에 여러 ‘묘수’가 담겨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이 개정안의 핵심은 △병원에 ‘병원경영지원사업’ 허용 △병원 간 인수합병 허용이다.

ⓒ시사IN 조남진지난 3월 중순 열린 ‘복지국가 제안 대회’에 모인 범야권 정치인들.

MSO(Management Service Organiza- tion)라 불리는 ‘병원경영지원사업체’는 문자 그대로 병원의 경영을 지원하는 업종이다. 병원을 대신해서 의료기기를 싸게 구입하고 의사·간호사 등 인력을 관리해주며, 마케팅(해외 환자 유치)이나 회계를 대행한다. 그런데 이 ‘MSO 허용’이 ‘병원 간 인수합병 허용’과 맞물리면 한국 의료계에 상전벽해의 변화를 일으킬 만하다. 예컨대, 대형 병원이 외부에 MSO를 설립하는 동시에 다른 중소 병원들을 인수해 계열화하는 경우다. 이 MSO는 대형 병원은 물론 인수된 계열 병원들에 경영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어떻게 보면, MSO를 중심으로 다수의 병원이 종횡으로 느슨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뚜렷한 사례는 ‘우리들병원’ 그룹에서 경영지원업체 구실을 수행하는 위노바이다. 이는 LG그룹에서 지주회사인 (주)LG가 LG전자·LG화학·LG디스플레이 등 자회사의 경영을 지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의보 민영화’ 안 해도 ‘의료 민영화’ 가능

다만 이런 ‘MSO-병원 집단’과 기업 집단인 LG그룹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직까지 MSO나 병원의 경우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는 것이 법률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외부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기반으로 영업활동을 한 다음 그 수익을 투자자에게 배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영리병원 도입’이다. 영리병원은 한마디로 ‘주식회사 형태의 의료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영리병원의 주인은 투자자(주주)이며, 따라서 그 경영 목표도 당연히 이윤을 극대화해서 병원의 ‘기업 가치’를 높이고 투자자들에게 배당을 많이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병원이 영리화된다면 이에 경영지원 서비스를 하는 MSO도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5월 초 제주도를 시작으로 ‘영리병원의 단계적 허용’을 올 하반기에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

영리병원과 ‘주식회사 MSO’가 허용되면, LG 등 지주회사 그룹과 동일한 형태의 ‘거대 병원 그룹’이 가능해진다. 병원이 드디어 기업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심지어 그룹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거대 병원 그룹’의 이윤 추구에 국민건강보험 체계는 장애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국민건강보험 체계에서 각 병원은 보험 가입자(전 국민)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고, 치료비나 약값도 일종의 국가기구인 건강보험공단과 협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높은 수익을 얻기 힘들다.

‘거대 병원 그룹’ 처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싼 의료 서비스(MRI·초음파·암 치료제 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연지정제에 대한 직접 공격이다. 투자자가 주인인 영리병원의 경우, 자유로운 이윤 추구(예컨대 자유로운 치료비 결정 등)를 가로막는 국민건강보험 시스템은 소유권이라는 ‘헌법적 권리’를 가로막는 횡포일 수 있다. 이에 따라 영리병원이 ‘당연지정제 완화 및 폐지’를 목표로 헌법소원을 낼 수 있고, 헌법재판소로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상당수 전문가들은 염려한다.

ⓒ시사IN 포토2008년 봄 촛불시위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는 ‘의료 영리화 반대’였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병원 그룹이 파트너로 선호하는 보험집단은 당연히 민영 보험사들이다. 아무리 강력한 민영 보험사라 할지라도 국가(공익)를 대표하는 건강보험공단보다는 약하고 수익에도 민감할 것이다. 병원 그룹으로서는 이런 민영 보험사와 거래하면 보험수가를 더 올릴 수 있고, 다양한 의료사업 부문도 창출할 수 있다. 이처럼 정부·여당이 주장해온 MSO, 병원 인수합병 허용, 민영 보험사 활성화 등은 ‘의료의 시장화’라는 맥락에서 수미일관하게 맞물려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신지원 애널리스트는 5월18일 낸 리포트 ‘의료시장에 2012가 온다’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현재 의료법 개정으로 주목되는 영리병원이 전격 허용될 경우, 2000년 의약분업의 파괴력만큼이나 강한 의료산업의 지형 변화가 10년 만에 재현될 전망이다. 쟁점 부문으로 떠오른 의료법 개정안은 실질적인 의료산업 민영화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논란의 핵심이다.”

이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움직임이 최근 시민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오는 7월 중순 발족할 예정인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시민회의)가 그것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모든 의료비를 해결하자는 주장이다.

현재 한국의 국민건강보험 시스템을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보면, 보험료는 적게 내는 대신 환자 본인이 병원에 직접 내는 돈(본인부담금)은 많은 편이다. 2008년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보장률(총의료비 중 건강보험공단이 보장하는 금액의 비율)은 62.2%이다. 이는 치료비가 100만원일 때 건강보험공단이 62만2000원을 내고 환자는 37만8000원을 낸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본인부담금이 환자의 가계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예컨대 암·백혈병 등은 연간 치료비가 1억원을 상회한다. 이 1억원 중 6220만원을 보장받아도 3780만원은 환자가 직접 내야 하는데, 이 정도의 금액을 쉽게 낼 수 있는 가구는 결코 많지 않다. 더욱이 MRI나 초음파, 암이나 백혈병 치료제, 선택진료 등 고가의 진료나 약품에는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국민건강보험 하나로는 서민 돕는 정책”

그런데 시민회의 측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장률을 OECD 국가의 평균 수준인 85%대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건강보험 재정을 확보하면 고가의 진료나 약품에도 국민건강보험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암 등의 중병 환자도 본인이 실제로 내는 금액을 연간 100만원 이하로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건강보험 재정의 파격적 확충이 필요하다. 2010년의 경우 36조2000억원을 48조6000억원 규모로 늘려야 한다. 이에 대해 시민회의 측은 건강보험료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현재 1인당 평균 건강보험료는 3만2000원 수준으로 추산되는데 1만1000원을 더 올리자는 것이다.

ⓒ시사IN 안희태금융시장에서는 우리들병원(위)에서 MSO 구실을 해온 위노바가 의료법 개정 시 최대 수혜자가 되리라 본다.
너무 과다한 인상 폭이 아닐까. 그러나 시민회의에 참여하는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실제로는 전체 보험료를 줄이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최근 연구조사 결과를 보면, 가구당 평균 20만원 정도를 민영 의료보험에 내고 있다. 그런데 이 돈의 아주 작은 부분만 국민건강보험으로 돌리면 민영 의료보험료는 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경제위기 시대에 이만큼 서민가계를 돕는 정책도 흔치 않다.”

민영 보험사에 낼 보험료 중 일부만 건강보험으로 돌리면 사실상의 ‘전 국민 무상의료’가 가능하다는 주장인 셈이다. 더욱이 상당수 전문가는 보험 가입자 형편에서 국민건강보험이 훨씬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현행 국민건강보험 제도의 경우, 직장 가입자가 연간 100만원을 내면, 직장 측에서 같은 금액인 100만원을 내고, 이렇게 조성된 200만원의 20%(40만원)를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 가입자로서는 100만원 지출로 모두 240만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확보하는 셈이다. 그러나 민영 보험사의 지급률(보험료 중 가입자에게 돌려주는 돈의 비율)은 75%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된다. 100만원을 내면 75만원 정도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2008년 현재 전체 가구의 81.4%, 20세 이상 성인의 69.8%가 각종 민영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시장 규모 역시 보험료 수입 기준으로 2003년 6조3000억원에서 2008년 12조원으로 5년 동안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지난 5월17일, 자유선진당 변웅전 의원 등이 발의한 건강관리서비스법의 핵심은 건강상담 등 건강관리 서비스를 국민건강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그만큼 공공 의료보장 체계의 범위가 줄어든다. 이와 함께 MSO, 영리병원, 민영의보 활성화 등을 통해 국민건강보험 체계의 형해(形骸)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앞장설 정부·여당 측의 ‘주력군’은 대형 병원과 민영 보험사이다. 이명박 정부는 굳이 ‘건강보험공단 민영화’ ‘당연지정제 폐지’ 따위 과격한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이에 반해 시민단체·학계·언론계 등으로 구성된 시민회의는 6월9일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범야권 인사 및 정치인들과 연대를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국민건강보험의 미래를 둘러싼 양대 세력의 전투가 지금 막 시작되고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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