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이지영 그림

〈초가삼간 오막살이〉(브로콜리숲, 2024)는 이문길의 열일곱 번째 시집이다. 1939년 대구에서 출생한 시인은 1959년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수료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등단을 하고 나서 시집을 내는 것이 순서이지만 시인은 대구에서 첫 번째 시집 〈허생의 살구나무〉(흐름사, 1981)와 두 번째 시집 〈내 잠이 아무리 깊기로서니〉(흐름사, 1983)를 먼저 냈다. 그러고는 한참 뒤인 1998년 〈현대문학〉을 통해 가로늦게 등단 과정을 밟았다. 등단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시인이 어떤 시를 쓰는지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무덤’ 전문을 보자. “왜 말이 없나/ 죽었으니깐// 죽었다고 말을 못 하나/ 죽도록 살려고 했으나 죽었으니/ 말 못 하겠다// 말도 못 하는 것이 땅에서/ 왜 동그랗게 튀어나왔나/ 억새는 왜 뒤집어썼나// 죽은 것이 어떻게 아나/ 너나 알지// 그럼 왜 여기 누워 있나/ 다른 데 가지 왜 골짝에 모여 있나/ 할 말 있거든 말해라/ 할 말 있거든 말해라.” 웬 미친놈이 야산에 있는 무덤에 대고 시비를 걸고 있고, 말을 못해야 정상인 무덤이 따박따박 대꾸하는 이 풍경은 웃음을 준다. 이 소박한 감상에 보탤 말이 있다면, 시인이란 죽음에 말 거는 미친놈이라는 거.

1983년 초에 이문길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동인지를 내면서 시인의 작품을 초대작으로 싣기로 했기에, 원고를 받으러 그가 일하는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로 찾아간 것이다(그 시절에는 보통 있는 일이었다). 첫 시집에 나온 약력에는 ‘효성여자대학교 원예학과 근무’라고 적혀 있지만, 그는 원예학과 교수가 아닌 학과에 필요한 시설의 관리와 설비를 맡은 용원이었다. 비닐하우스에서 만난 시인은 작업복을 입고 나무를 옮기고 있었다. 그때 받은 시 세 편 가운데 ‘4월’ 전문이다.

“집 울타리에 개나리, 라일락, 망우리가 맺고/ 산 위에는 오리목, 자귀나무, 소나무 새순이 나온다.// 땅에서는 원추리 새순이 나오고/ 응달의 쇠뜨기풀 누른 잎도 푸르러진다./ 나는 산을 바라보고 고함친다./ ‘산에 사람 있거든 나오시오’// 야생화 향기 속에서도/ 지난 가을에 져간 낙엽의 냄새가 난다./ 땀냄새도 난다.// 나는 커가는 산을 바라보고 고함친다.// ‘오시오 그리운 사람이여/ 나오시오 산풀 우거져 길 없어지기 전에'” 이 시도 앞서 본 작품과 동일한 상황을 연출한다. 봄이면 죽었던 것처럼 보이는 수목이 되살아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러니 무덤 속의 사람도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게 아닌가. 시인은 마른 나무에 새순이 돋고 잎이 나는 것을 ‘산이 커간다’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산풀 우거져 길 없어지기 전에” 어서 산(무덤)에 사람 있거든 어서 나오라고 안타까이 부른다.

그날 비닐하우스에서 시인으로부터 한산과 습득에 대한 귀동냥을 하고, 〈한산시〉(홍법원, 1970)를 구입했다. 당나라 중엽의 인물인 한산(寒山)은 저장성 천태산에 있는 선종의 본산 국청사 근처에 살았던 재가불자이자 은거 시인이다. 그는 국청사에서 밥을 짓고 물 긷는 일을 하는 불목하니 습득(拾得)과 시를 주고받았다. 한산이 쓴 312수와 습득이 쓴 54수, 그리고 국청사의 선사 풍간(豊干)이 쓴 두 수를 모은 시집을 〈천태산국청사삼은시집〉이라고 하는데, 한산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그냥 〈한산시집〉이나 〈한산시〉라고 한다.

선비 계층에서 태어나 유교와 도교를 거쳐 불교에 안착한 한산의 시 주제는 꽤 폭넓은 편이나, 그 바탕에는 하나같이 선(禪)의 관점이 관철되어 있다. 그래서 시인이면서 한국의 대중에게 선을 최초로 알린 석지현은 〈선으로 가는 길〉(일지사, 1975)에서 한산을 “선시의 시발(始發)”이라고 썼다. 선시는 현세와 인연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동시에 불교의 깨우침에 이르는 수행의 경지조차도 선종 자체의 논리로 철저히 부정한다. 기존 관념이나 언어를 불신하고 파괴하려는 현대시의 노력도 어떻게 보면 선시의 그것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한산의 시는 송나라 때 일본으로 건너가, 하이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마쓰오 바쇼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인연과 업보를 벗어난 상태

첫 두 시집에서도 그랬지만 시인의 열일곱 번째 시집인 〈초가삼간 오막살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소재와 주제는 잠과 집이다. 일상에서 잠이 죽음의 완곡어로 쓰이는 경우는 흔하지만 시인에게는 아예 동일어다. 또 시인이 집을 말할 때는 무덤과 중의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번 시집의 제목이 나온 출처이기도 한 ‘문 닫힌 집’은 앞서 본 ‘4월’과 발상이 비슷하다. 전작에서는 산이 무덤이었지만, ‘문 닫힌 집’에서는 집이 무덤이 된다. 이것은 죽음과 자신과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시인의 연령을 생각하면 숙연해지는 대목이다.

그가 죽음을 거듭 노래하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그것이 슬퍼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오고 싶지 않은 곳에 와서/ 살고 싶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 싫었다/ 나는 사람이 있기 전에 있었던 곳/ 내 생명이 없었던 곳/ 그곳에 가서 살고 싶었다// (…) // 나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가보고 싶었다/ 세상 생명이 없는 곳/ 거기 가보고 싶었다/ 거기 가서 혼자 살고 싶었다”(‘살 수 있는 길’ 일부). 시인의 경지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이 시를 ‘죽음은 또 다른 형태의 삶’이라는 달달한 위안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다. 시인은 인연과 업보를 벗어난 상태를 죽음이라고 일컫는다. 얼마나 좋은 죽음인가.

시인은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이 시집에는 예수나 하느님보다 부처가 더 자주 나온다. 그런데다가 ‘감사 기도’와 ‘천당’ ‘천상’ 같은 시에서 하느님이나 천당은 부정되었다. 시인이 불교도라는 것은 이 시집의 제목이 웅변한다. 불교는 시간에 대한 복잡한 논변을 갖고 있지만, 시간 자체를 페이크(fake:가짜의, 거짓된, 모조품, 사기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교의 기본적인 시간관은 윤회(순환)와 겁(무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중단이 없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이나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혁명이 없다. 동양의 자연신학(산수를 서양의 인격신처럼 신격화하는 것)과 시인의 무욕·무상의 상징인 ‘초가삼간 오막살이’는 모두 새로운 시간의 계기인 중단에 저항한다. 기독교에서 우상 숭배라고 할 때의 우상(공간)만 있고 시간은 없는 것이다(현상유지적이다). 몇몇 출판사에서 절판된 시집을 복간하는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 시인이 제일 아끼는 〈내 잠이 아무리 깊기로서니〉가 다시 나오길 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