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탁 잠수사(49)는 세월호 참사 때 활동한 민간 잠수사들 중 몇 안 남은 현역 잠수사다. 당시 희생자들을 직접 수습했다는 육체적·정신적 무게는 참사 10년이 지난 이후에도 오롯이 그들만의 몫으로 남아 있다.
“ ‘가자’ 그 한마디뿐이었어요. 그렇게 바로 상진이 형과 보따리 싸가지고 내려갔거든요. 그때 저희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그때 아내는 내가 내려가면 한 일주일 있다 오는 출장인 줄 알았대요. 제가 17일(2014년 4월)에 내려갔을 때 처음엔 배에서 기름을 빼야 한다고 했어요. 배에 올랐는데 해경에 계신 형님이 그러더라고요. ‘지금 기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애들이 지금 보이는데, 한 명도 안 나왔다.’ 그렇게 처음에 들어간 팀이 배 유리창부터 깼어요. 제가 줄 잡고 상진이 형이 깨고 들어가서 첫 번째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그렇게 시작됐어요.
처음엔 너무 열악했죠. 해경함을 탔다가 나중에 작은 바지선에 올랐는데 잘 데도 없었어요. 그런 건 괜찮았는데, 너무 우왕좌왕이었어요. 이렇게 큰 여객선이 빠진 게 처음이라, 해경도 다이버들도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큰 크레인 달린 인양선 보셨죠? 제가 알기론 2000t 넘는 게 3대가 왔는데 와서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보여주기 식이었죠. 마지막에 와야 될 배가 와서 그냥 떠 있는 거죠. 전 국민이 보고 있으니까.
제일 가슴 아픈 건 빨리 들어가서 애들 데리고 나와야 하는데 그게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앞으로 이런 참사가 생기면 태스크포스니 뭐니 짜여질 텐데, 참 걱정이에요.
전 그냥 유가족이 너무 안됐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저도 애들을 많이 데리고 나왔어요. 유가족들이 손 잡아주고 하는데, 얼굴도 못 보겠더라고요. 너무 감정이입이 되는 거예요. 저도 애들 너무 좋아하는데, 유가족들한테 그냥 미안하고 힘내시라고 말하는데…(울음) 바지선에 있을 때는 잠을 자려고 누우면 또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울고 있으면 곳곳에서 다 우는 거예요. 정말 다들 미치지 않고 버티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아, 그리고 그 수영 교육 바뀐 거 알고 계시죠? 생존 수영으로요. 저는 이거 무조건 강추해요. 그거 해야 돼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게 바뀐 거네요. 10년이 지났는데 그게 바뀌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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