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3일 문정인 당시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오른쪽)이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가운데)을 만났다.
2018년 5월3일 문정인 당시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오른쪽)이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가운데)을 만났다.

고령의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문정인 당시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연세대 명예교수)는 그의 왼편에 앉았다. 2018년 5월3일 미국 뉴욕의 키신저 사무실에서 이들의 만남이 성사됐다. 엿새 전 치러진 4월27일 판문점 선언의 후속 조치를 고민하는 문재인 정부 인사들이 키신저 전 장관과 의견 교환을 했다. 공공외교의 일환이었다.

당시 95세였던 지략가는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없었다. 자신의 의견을 두루 제시했다. 당시 한반도 정세에 대한 키신저 전 장관의 분석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와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예상만이 아니라, 향후 주한미군 주둔 및 한반도 이슈의 중국 관여 등으로까지 뻗어나갔다. 70분 동안의 면담 내용은 문정인 특보 쪽에서 정리해 문재인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해당 비공개 기록을 〈시사IN〉이 입수했다. 키신저 전 장관이 한반도 현안에 대해 직접 견해를 표명한 사료(史料)이기도 하다.

헨리 키신저 전 장관은 지난 11월29일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최근까지도 그는 가자지구 사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AI 이후의 세계 등 현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며 활동했다.

그는 냉전 시기 미국 외교의 상징이었다. 1972년 미·중 수교의 토대를 닦았다. 미·소(소련)의 긴장 완화(데탕트)에 핵심 역할을 했다. '현대판 마키아벨리스트'라 불리는 그가 진단한 ‘2018년 한반도 전략’은 2023년에도 눈여겨볼 지점이 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조건을, 현실주의 외교 수장의 시각에서 살폈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를 고민하는 이들을 향한 조언이다.

100세의 일기로 타계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사진)은 냉전 시기 미국 외교의 상징이었다. 1972년 미·중 수교의 토대를 닦았다. 미·소의 긴장 완화에 핵심 역할을 했다. ⓒAP Photo
100세의 일기로 타계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사진)은 냉전 시기 미국 외교의 상징이었다. 1972년 미·중 수교의 토대를 닦았다. 미·소의 긴장 완화에 핵심 역할을 했다. ⓒAP Photo

■비핵화 이후에도 “주한미군 주둔해야”

키신저 전 장관과 문정인 교수의 대화는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로 시작했다. 문정인 교수는 2018년 4월30일 ‘한반도 평화를 향한 진정한 여정(A Real Path to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사흘 전 이뤄진 판문점 선언의 의미와 과제를 짚었다.

당시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이 글에 언급된 주한미군 관련 부분을 문제 삼았다.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다’는 식의 공격이었다. 원문에 쓰인 주한미군 관련 내용은 이렇다.

“만약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은 어떻게 되는가? 평화협정 채택 이후에도 미군이 계속 한국에 주둔할 명분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감축과 철수에 대해 거센 보수층의 반발이 있을 것이고,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중대한 정치적 딜레마로 작용할 것이다. 정권 교체 이후의 이행도 보장하기 위해서 국회의 선언 비준을 추진하고 싶겠지만 보수적인 야권이 이행 노력을 가로막고 비준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다.”

키신저 전 장관은 ‘북한의 비핵화와 주한미군 문제’는 연계되는 이슈라고 판단했다. 뿐만 아니라 이 논의는 중국과 관련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적 시각도 내비쳤다. 그는 미·중 사이 세력 균형을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 요소로 봤다. “개인적으로 중국의 동아시아 역내 영향력을 고려할 때, 미·중 간 세력균형이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며(equilibrium between the US and China), 同(동) 차원에서 어떤 형태로든 미국의 존재가 한국에 남아 있기를 희망함(some form of American presence in Korea).”

문정인 교수는 이렇게 물었다. “한국인 대부분은 중국보다 미국에 더 가깝다고 인식하며, 미국이 역외 균형자 역할(the role of offshore balancer)을 해주길 바라고 있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와도 동북아의 전략적 안정성 유지 및 한국의 정치적 혼란 방지 차원에서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을 희망하는 정서가 강하다.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이라고 보는가.”

키신저 전 장관의 답변은 명확했다. 트럼프 행정부 일각에서 나오는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효과적인 대안 없이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된다면 아시아와 서방 국가 간 분열이 심화될 것이며(division between Asia and Western countries), 이는 결국 한국에 위협이 될 것임.”

그러면서 키신저 전 장관은 이렇게 덧붙였다고 문정인 교수는 전했다. ‘한반도에 종전선언과 평화체제가 실현되면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을 정당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한국의 대통령이 국민적 합의를 이루고 이를 근거로 미국 대통령과 의회를 설득할 때 평화체제 이후에도 주한미군의 유지가 가능할 것이라 본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났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났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중국을 배제한다면 어떤 전략도 매우 위험”

2018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상황은 바쁘게 돌아갔다. 그해 4월 판문점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났다. 판문점 선언에는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2018년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부분이 나온다.

연이어 6월에는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회담 직후이자 북·미 정상의 역사상 첫 만남이 논의되던 때, 문정인 교수는 키신저 전 장관을 만났다. 남북, 북·미, 남·북·미 사이 다양한 역학관계가 맞물려 움직이던 상황이었다. 역할을 찾던 중국은 급하게 왕이 당시 외교부장을 5월2일 평양으로 보냈다. 중국 외교 수장의 방북은 11년 만이었다. ‘중국 패싱’ 논란이 나오던 때였다.

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에 대해 언급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중국을 소외시키기에는 중국이 한반도에서 너무 가깝고 너무 강력함(too close and too powerful). 설사 중국을 배제시키고 남북미가 모종의 평화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중국은 동 협정의 이행을 방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China can prevent the implementation of the agreement).” “중국을 배제하는 어떠한 전략도 매우 위험함(making strategy that excludes China is very dangerous).” “한국이 중국을 배제한 안보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음.” 중국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지극히 현실주의적 판단에 기초한 조언인 셈이다.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났다. ⓒ싱가포르정부 제공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났다. ⓒ싱가포르정부 제공

■“비핵화에 대해 지나친 상세한 정의는 실패 확률 높여”

결국 쟁점은 비핵화다. 비핵화에 대한 의견을 어떻게 좁혀가는지다. 2018~2019년 당시 활발히 진행되던 남북-북·미 대화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이행 방식과 미국의 상응 조치’가 적극 논의됐다. 2018년 싱가포르에 이어, 2019년 베트남에서 만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결국 ‘노딜’로 헤어졌다.

당시 양쪽의 말이 엇갈렸다. 미국은 북한이 완전한 제재 완화를 요구하면서 영변 핵시설 폐기만 제시했다고 밝혔다. ‘영변 플러스 알파’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북한은 제재 전면 해제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제재 일부 해제의 대가로 핵 전문가들 입회 하에 영변 핵시설을 영구 폐기하겠다는 안을 내놨다는 것이다. ‘비핵화’의 각론을 합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키신저 전 장관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비핵화 이슈 다루기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안다고 밝혔다. “본인은 과거 러시아와 군축 협상을 해봤기 때문에 이러한 이슈의 복잡성(complexity of this kind of issue)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 “북한의 비핵화는 장기간의 과정이 될 것인바, 핵무기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속도로 비핵화를 추진하며, 비핵화 과정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지 등 세부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임.”

그렇기에 조급해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비핵화 문제에 정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음(We owe it to ourselves to be surprised). 북핵 문제는 이미 지난 수십 년간 존재했으며, 반나절 만에 해결될 수 없다고 봄(can’t be solved in one afternoon).” “비핵화에 대해 지나치게 상세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실패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봄.” “한미 정상 간 전화통화와 정의용(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볼턴(미국 백악관 국가안보 회의 보좌관) 채널 가동은 현 진행 과정의 중요한 부분임. 한미 간 북핵 문제 관련 소통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함.”

“다만, 한국은 미국이나 북한이 어떠한 제안을 하든지 관계없이 스스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을 내려야 함. 한국은 미국의 우방국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미국에게 해결하라고 할 수 없으며(as friends, you can’t put it all on the US), 모든 것이 미국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도 없음(you can’t say everything depends on what the US does).”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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