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문송면, 원진 30주기 추모와 반올림 농성 1000일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30년 전 고 문송면 군 사건 관련 투쟁 홍보물을 들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2018년 7월 ‘문송면, 원진 30주기 추모와 반올림 농성 1000일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30년 전 고 문송면 군 사건 관련 투쟁 홍보물을 들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프리모 레비의 에세이집 〈주기율표〉에는 단편소설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한 편은 프랑스 혁명과 반혁명이 이어지던 19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미지의 시대, 이름마저 ‘적막섬’인 외딴섬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렸다. 퇴역 군인인 주인공의 아내가 섬에서 즐겨 찾는 동굴은 미심쩍은 곳이다. 동굴 바닥은 복통이 일어난 것처럼 꾸르륵 소리가 나며 뜨거워지고, 바위틈에서는 유황 냄새가 나는 김이 뿜어져 나온다. 아내는 이곳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듣고 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동굴에서 알록달록한 진사(辰砂·수은으로 이루어진 황화광물)를 발견하기도 한다. 화학자가 쓴 소설이 아니었다면, 독자는 흑마술과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는 환상소설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의 제목은 ‘수은’. 막연하고 불길한 공포에 사로잡힌 주인공과 달리 나는 ‘어허, 지금 중독되고 있다고! 얼른 거기서 나와!’ 조바심을 냈다.

어느 날 저녁, 예고 없이 화산이 폭발한다. 무서운 불길과 용암의 흐름이 멈춘 뒤 마을 사람들은 동굴을 찾는다. 동굴 천장의 갈라진 틈으로 반짝이는 방울들이 무수히 떨어지고 있다. 무겁고 반짝이는 방울들은 바위를 만나 작은 방울로 부서져 흘러 웅덩이를 만든다. 신비로운 광경에 정신을 빼앗긴 이들은 웅덩이에 손을 넣어보고 얼굴에 뿌리기도 한다. 이쯤 되면 보건학을 전공한 독자는 눈을 질끈 감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소설은 폐쇄적 공동체의 광기, 전근대의 도덕감각, 급만성 수은중독 증상을 분간하기 어려운 인물들의 기행(奇行)을 보여주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디지털 체온계만 보고 자란 청소년들은 깨진 체온계에서 또르르 굴러나온 반짝이는 금속 방울이 얼마나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지 모를 것이다. 한자어 수은(水銀)은 말 그대로 물(水)처럼 흐르는 은(銀)이다. 수은을 나타내는 원소기호 Hg는 라틴어 hydragyrum에서 따온 것인데, 이 역시 물(hydor)과 은(argyros)의 합성어다. 영어로 ‘quick silve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상온에서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이 특별한 중금속에 대한 옛사람들의 느낌은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했던 것 같다.

수은은 말 그대로 물처럼 흐르는 은이다. 수은에 의한 환경오염과 건강 피해가 알려지면서 사용량이 줄었다. ⓒ위키피디아
수은은 말 그대로 물처럼 흐르는 은이다. 수은에 의한 환경오염과 건강 피해가 알려지면서 사용량이 줄었다. ⓒ위키피디아

수은은 진사(辰砂), 즉 황화수은 광석(cinnabar ore, HgS)을 태워 얻을 수 있다. 붉은 돌을 태워서 은빛 액체를 만들어낸다니 연금술의 한 장면이 저절로 연상된다. 실제로 중세 서양의 연금술에서 수은은 금, 은 등과 함께 점성술의 주요 행성과 연관된 7대 원소 중 하나로 귀하게 여겨졌다.

수은은 현대 인간 사회에 쓸모가 많다. 예컨대 수은가스는 전자에 의해 자극되면 자외선을 방출한다. 이 자외선이 형광물질을 바른 유리를 통과하면 가시광선으로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형광등의 원리이다. 수은은 상온에서 액체 상태이면서 온도변화에 따른 수축과 팽창 비율이 일정하다는 특징 때문에 온도계에도 활용된다. 밀도와 표면장력은 높은 반면 압축성과 부식성은 낮기 때문에 압력 측정에 이용하기도 좋다. 혈압을 수은 기둥의 높이로 측정하던 수은혈압계의 전통 때문에, 전자혈압계가 보편화된 오늘날에도 혈압의 측정 단위는 여전히 ㎜Hg로 남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수은과 은을 합금한 아말감은 충치 치료의 중요한 재료였고, 전자시계나 계산기 같은 작은 전자제품에도 수은 전지가 필수였다.

하지만 수은에 의한 환경오염과 건강 피해가 널리 알려지면서 이제 수은을 이용한 일상용품들은 사라져가고 있다. 특히 우려를 자아내는 것은 해양오염과 체내 축적이다. 바닷속 미생물에 의해 메틸수은(CH3Hg+)으로 전환되면 먹이사슬을 통해 어패류와 포유동물에 축적된다. 바로 이 메틸수은 때문에 임신·수유 중인 여성과 어린이의 생선 섭취에 주의가 필요해졌다. 참치나 황새치처럼, 먹이사슬 위쪽에 있는 대형 어류일수록 중금속 축적량이 많아지므로 피해야 할 대상이 된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공해병’ 중 하나인 미나마타병은 미나마타시의 짓소(ちっそ, Chisso) 화학공장이 아세트알데하이드 생산공정에서 부산물로 생성된 메틸수은을 근처 바다에 무단 방류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배출원이 다양하고 피해도 광범위한 생태계 오염 통제에 비하면, 작업 현장에서 수은을 관리하는 것은 훨씬 쉽다. 수은 증기를 흡입하거나 수은 액체가 피부에 닿지 않도록, 용기와 공정을 밀폐하고 배기장치와 호흡보호구를 활용하면 된다. 주기적으로 실내 대기와 노동자 소변의 수은 농도를 모니터하는 것도 혹시 모를 노출을 감시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쉬운 일보다 더 쉬운 것은, 아예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미나마타병 그리고 15세 소년의 죽음

1987년 12월5일, 충남 서산의 중학교 3학년 문송면 학생은 야간 공고 진학을 위해 교장선생님 추천서를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취업한 협성계공㈜은 압력계와 온도계를 만드는 곳이었다. 문 군은 처음에는 도장실에 배치받아 압력계 커버에 페인트를 칠하고 시너를 이용해 세척하는 보조 업무를 맡았다. 2주 후 그는 온도계 팀으로 이동하여 약 5일 동안 수은 주입 업무를 하다가 다시 압력계 부서로 옮겨갔는데, 이때부터 불면증·두통·식욕감퇴 증상이 나타났다. 1월20일께 동네 의원에서 감기 치료를 받았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병명도 모른 채 고통받던 그가 수은중독을 진단받은 것은 두 달 뒤인 3월14일이었다. 그리고 채 4개월이 지나지 않은 7월2일, ‘퀵실버’라는 별명에 부합하기라도 하려는 듯, 수은은 15세 소년의 생명을 앗아갔다.

회사와 정부는 이 시간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 1월20일, 건강 때문에 휴직계를 제출하려 했을 때, 회사는 다쳐서 휴직하는 게 아니라는 각서를 요구했다. 2월8일부터 휴직계를 내고 통원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자 2월16일 고향인 서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곧 전신발작을 일으켜 동네 병원을 거쳐 2월19일 서울 고대구로병원에 입원했다. 원인은 여전히 찾을 수 없고 혈압이 190/140까지 올라가는 등 병세는 더 심해졌다. 80만원이 넘는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3월5일에 퇴원했다. 불면증·고혈압·통증·정신장애 등이 한층 심해지면서, 마지막 기대를 안고 3월9일 서울대병원 소아병동에 입원했고 3월14일에 드디어 수은중독 및 유기용제 중독을 진단받았다.

가족은 회사에 산재 처리를 요구했지만, 회사는 일을 하다 중독되었다는 증거를 가져오라며 거부했을 뿐 아니라 서울대병원 의사를 찾아가 항의하기까지 했다. 노동부에 문의하니 서울대병원이 산재 지정 병원이 아니라며 산재 신청을 하려면 한강성심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병원비가 밀려 있어 당장 병원을 옮길 수 없었다. 4월6일, 가족은 의사소견서와 함께 산재신청서를 작성하여 다시 회사에 찾아갔지만 역시 날인을 거부당했다. 할 수 없이 사업주 날인이 없는 채로 노동부에 산재신청서를 접수했다. 그러나 4월16일 노동부는 이를 반려했다. 사업주 확인과 날인이 누락되어 있고, 진단기관인 서울대병원이 산재보험 미지정 의료기관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5월4일, 문 군의 형이 다시 회사를 찾아가 산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튿날에는 사장이 서산의 집으로 직접 찾아와 모친에게 ‘의사와 짜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폭언까지 했다.

5월7일, 가족은 구로노동상담소의 도움을 받아 〈동아일보〉와 인터뷰했고, 5월11일부터 여러 언론에 이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5월23일 무렵 춘천 후평공단에 위치한 온도계 제조업체에서 노동자 10여 명의 집단 수은중독 사건이 벌어졌다. 기업과 노동부의 무책임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는 가운데, 6월20일 드디어 산재 요양이 승인되었다. 이제 최소한 병원비 걱정은 덜 수 있게 되었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1988년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가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 군(당시 15세)의 노동자장(葬) 장면. ⓒ일과건강 제공
1988년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가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 군(당시 15세)의 노동자장(葬) 장면. ⓒ일과건강 제공

사건 조사 과정에서 황당한 사실들이 밝혀졌다. 문송면 군이 수은에 노출되고 건강이 악화되던 바로 그즈음인 1988년 1월7일, 형광등 제조업체 성광기업의 직원 25명 중 18명이 만성수은중독 상태임이 밝혀졌다. 노동부는 수은 취급 사업장 일제 점검을 지시했다. 그에 따라 협성계공에서도 1월26일 특수건강검진과 작업환경측정이 이루어졌다. 대기 중 수은 농도는 허용 기준치보다 높았고, 작업 현장에는 육안으로 보일 만큼 수은 방울들이 떨어져 있었다. 수은 주입실 근무자 6명 전원의 소변에서 기준치보다 높은 수은이 검출되었고, 4명은 치료가 필요한 정도의 수은중독 상태였는데 그중 셋은 미성년자였다.

2018년에야 폐지된 산재 사업주 날인 제도

하지만 노동부는 임시건강진단을 실시하라는 지시 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후 5월17일 검진에서도 6명 전원이 유소견을 나타냈으나 역시 사후 조치는 없었다. 15세 소년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의사들은 무슨 병인지 몰라 고심하던 그 시기, 가족들은 치료비가 없으니 제발 산재를 인정해달라고 회사와 노동부에 애원하던 바로 그 시기, 직업병인 증거가 있느냐며 회사가 발뺌하고 노동부는 절차를 문제 삼으면서 산재신청서를 반려하던 바로 그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고 문송면 군 장례위 활동 보고서 및 자료집’을 오랜만에 다시 열어보았다. 그의 1주기인 1989년 7월 장례위원회가 펴낸 것으로, 필자가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인 노동건강연대가 2009년 한국사회과학자료원에 기탁한 것이다. 당시 사건 일지, 언론 기사, 시민들의 추모글을 꼼꼼히 읽다 보면, 기업과 정부의 환상적 연금술이 수은의 독성보다 치명적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소위 빅 5 병원이 산재요양기관으로 지정된 것은 문송면 군의 산재 신청이 반려된 지 20년이 지난 2008년이었다. 산재 신청 시 사업주에게 확인을 받아야 하는 사업주 날인 제도는 그보다 10년 뒤인 2018년에 폐지되었다. 그 시간을 채운 것은 산재 노동자와 가족들의 고통이었다.

문송면 군을 비롯한 숱한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고통의 시간을 안겨준 수은의 공식 명칭은 ‘mercury’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 ‘수성(Mercury)’에서 따왔다. 모자와 장화에 달린 날개를 상징으로 하는 ‘머큐리’는 로마 신화에서 가장 날쌘 신(神)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가장 빠른 행성’에 ‘빠른 은(quick silver)’ 원소를 연결한 것이다.

옛날 연금술사들은 수은이 고체와 액체, 이들이 각각 상징하는 지상과 천국, 삶과 죽음을 초월한 원소라고 믿었다. 하지만 수은에 노출된 인간과 동물들은 이러한 초월의 신비를 누리지 못했다. 모자와 장화에 날개를 단 머큐리는 쏜살같이 움직인다지만, 머큐리에 노출된 노동자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기자명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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