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김대중)의 사상과 실천은, 1998년 집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집권 이전의 김대중은, 1960년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항하며 형성된 민주화운동 세력의 대안적 경제노선을 포괄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권 이후의 김대중은 세계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면서 ‘한국형 신자유주의’라고 불릴 만한 모델을 정초한다. 달리 말하면 이는 한국 자본주의를 지구화한 금융자본주의에 적극 적응시켜나가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변신’의 이유를, 김대중은 〈역사비평〉 2008년 가을호, 박명림 연세대 교수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1999년 12월7일 외환위기 당시 캉드쉬 IMF 총재(왼쪽)를 만난 김대중 대통령.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 정부를 맡아보니 한국이라는 나라의 금고에 외화 달러가 불과 39억 달러밖에 없었습니다.”

수천억 달러 규모의 외국인 빚쟁이들이 벼르고 있는데 금고는 비어 있는 상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야 한다. 그러나 IMF는 악랄한 빚쟁이. 시키는 대로 국내 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대중경제론의 비현실성

그래서 김대중은 IMF가 채무국에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수준 이상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약속(이른바 ‘IMF 플러스’)하고 구제금융을 제공받는다. 이 ‘약속’ 중에는 그가 정말 피하고 싶었을 ‘노동시장 유연화’ ‘알짜 기업 및 금융기관의 해외 매각’ 등도 포함되었을 터이다. 이처럼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 ‘나라 금고가 비어 있었다’는 것은, ‘대중경제론’의 김대중이 신자유주의자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던 필요 충분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1971년 발표된 대중경제론은 김대중의 정치력과 박현채의 경제학이 화학적으로 결합하며 탄생한, 민주화운동 세력의 정치·경제 노선이다. 박현채는 당시 외형적으로 엄청난 실적을 거두고 있던 박정희의 수출지향적 경제발전 노선을 비판한다.

“외견상 자립경제의 요구를 내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자의존형이며, 외국 자본을 주축으로 한 수출입국형의 대외의존적 경제구조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경제는 양적 성장과 외부적 화려함의 뒷전에서 멍들어가고 텅 빈 강정이 되어간다.”

당시 한국 경제는 외국에서 빌린 돈을 밑천으로 수입한 원자재 및 중간재로 제품을 생산한 뒤, 이를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방식으로 고속성장했다. 그러나 대중경제론적 인식에 따르면 이는 한국 경제의 빈곤과 대외 종속성을 확대·심화해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대중경제론은 “자립적 국민경제 구조의 실현” “중소기업과의 유기적 관련 하에 …국민적 산업에 의한 상대적 자급자족 체제 실현” 등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1968년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그러나 1971년 이후 40년이 흐른 오늘날, 대중경제론의 오류는 너무도 분명하다. 무엇보다 외자의존형·수출지향형인 한국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해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사실 한국 등 개발도상국이 기초 생산설비도 갖추지 못했던 1960~1970년대에 ‘외자 의존’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외자를 얼마나 유리한 조건에 빌려올 수 있는지가 문제였을 뿐이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은 자신의 대중경제론 노선을 추진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외환위기라는 대외 조건이 이를 용납하지 않은 측면도 있었지만, 김대중 정도의 정치인이라면 20세기 말엽에 ‘상대적 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그가 실제로 한 일은 대중경제론과 가장 먼 거리에 있다고 해야 할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급진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김대중이 집권 이후 추진한 변혁은 ‘금융개혁을 통해 한국의 기업과 은행을 국제 주식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으로 바꾼 것’이었다.

가장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혁명가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1970년대 한 가전업체 공장 모습.
외환위기 이전의 한국에서 대기업과 은행은, 주식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대기업은 피라미드 형태로 그룹을 이뤄 재벌 가문의 손아귀에 장악돼 있었고, 은행은 사실상 국가의 소유였다. 더욱이 한국 기업과 은행은 전자가 후자에게 빌린 거액의 부채를 통해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이를 강제로 분리한 것이 김대중 정부의 금융·기업 개혁이다.

김대중 정부는 기업의 경우 부채비율 200%, 은행의 경우 BIS 비율 8%를 제시했다. 기업은 은행 부채를 줄이는 대신 주식(소유권)을 팔아 자금을 조달하고, 은행 역시 기업대출을 대폭 줄이라는 이야기다. 기업들과 은행들은 자사의 주식을 팔아 부채를 줄이는 과정에서 분리되었고, 각각 주식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기업 주식에 대한 외국인의 소유한도를 철폐하고, 대기업의 주식을 취득할 때 시행되던 여러 규제를 폐지함으로써 외국 자본도 주식시장(자본시장)에서 한국 기업을 사고팔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외환의 유출입도 자유로워지게 했다. 군사독재와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이루지 못한 파격적 시장자유화 및 개방 조처다.

김대중 집권 이후에야 한국 경제는 세계 금융자본주의 질서에 포섭된 것이다. 한국 기업의 경영자들은 서구 경영자들보다 10여 년 늦기는 했지만 비로소 ‘주식가치 올리기’를 경영 목표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개방된 자본시장 환경 속에서는, 한국 기업 역시 주식가치를 올리지 않으면 퇴출되거나 다른 기업에 인수합병(M&A)될 위험이 커진 것이다.

이처럼 김대중 정권은 ‘좌파 빨갱이’ 운운하는, 사회 일각의 정신분열증적이고 권력투쟁적인 마타도어(흑색선전)와 반대로 지구적인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 추세에 자신의 국가를 지나치리만큼 급진적으로 포섭시켜버린 정부였다. 이렇게 김대중 정권이 뚫은 길을 노무현 정권은 따라갔다.

김대중식 신자유주의 개혁에서 결과적으로 가장 큰 수혜자는 삼성, 현대, LG 등 한국 최대의 재벌 그룹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주주가치 경영 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오늘날 세계적인 첨단 거대기업으로 발전했다. 삼성 등 초국적 기업은 지구적 차원에서 원부자재를 구입하고 생산기지를 배치하며, 전 세계에 판매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으로서는 중소기업의 퇴출, 실업, 일자리 불안 등으로 이어지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우파가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보통인 서구나 제3세계와 달리 한국에서 이를 밀고 나간 것은 김대중이라는 진보 정치인이었다. 자연스럽게 한국 신자유주의 개혁은 민주화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개혁의 핵심이 ‘기업을 주식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면, 한국에는 이런 개혁을 저해하는 세력이 있었다. 바로 소수 지분으로 전체 계열사를 전횡하는 재벌 가문이었다. 이런 재벌 가문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은 김대중식 신자유주의 개혁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런데 이는 민주화운동의 전통적 목표이기도 했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 개혁과 민주화운동이 손을 잡았다.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아우라’까지 안고 추진된 것은 한국의 독특한 경험이다. 김대중이 아니었다면 한국 신자유주의 개혁이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성공한 신자유주의 개혁’ 10년

그러나 김대중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리해고제를 법제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복지를 강조했다.

1998년 8월19일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앞에서 정리해고 반대 대규모 파업시위에 참여한 4000여 노동자.
그에게 ‘민주적 시장경제’는 “시장경제와 복지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 보완하면서 경제가 발전하는 시스템”이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빈곤선 이하의 저소득 국민에게 국가가 최소한의 기초생활을 보장)을 통과시킨 것이 대표 사례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기초 생활’을 보편적 사회권으로 누릴 자격이 있다는 철학의 탄생이기도 하다. 김대중은 또한 의료·연금·고용·산재 등 4대 보험의 적용 대상을 전 국민과 전 사업장으로 넓혔다. 특히 건강보험의 경우 의약분업을 관철하고, 전국적인 단일 보험자 조직을 형성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높은 파도 앞에서 공공성 중심의 국가 의료제도를 끝까지 지켜내고 발전시켰다.”(8월20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추도사)

우파가 주도한 해외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기존 복지제도를 철폐하며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상당히 이례적인 형태의 신자유주의가 한국에서 발전되었던 셈이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민주정부 아래서 그나마 ‘인간적’으로 신자유주의 변혁이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민주화운동 세력이 타락한 것일까.

한국의 지난 10년이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개혁’ 중에서는 상당히 성공한 편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김대중·노무현 집권기 동안 외환보유고는 39억 달러에서 2600억 달러까지 상승했고, 매년 평균 4~5%대의 경제성장률로 국민소득도 2만 달러 가까이 치솟았다. 환율은 950원까지 내려갔다. 재정 건전성도 파격적으로 개선되어 국가채무 수준이 OECD에서 가장 우량한 20% 후반대에 머물렀다. 다만 아무리 성공해도 ‘신자유주의 개혁’이니만큼 일자리와 삶의 불안은 어쩔 수 없었다. 이는 성공한 신자유주의 혁명가 김대중 생애의 한계이기도 하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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