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4일 유인촌 문체부 장관 후보자가 서울 종로구 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했다.ⓒ연합뉴스
9월14일 유인촌 문체부 장관 후보자가 서울 종로구 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했다.ⓒ연합뉴스

유인촌 장관이 돌아온다. 2008년 이명박(MB) 정부에서 같은 자리에 임명된 지 15년 만이다. 9월13일 윤석열 대통령은 유인촌 대통령실 문화체육특별보좌관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대통령실 문화특보에 임명된 뒤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문화계의) 새 틀을 짤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지명에 비판적인 한 문화계 인사는 MB 정권 때의 ‘블랙리스트’ 논란 같은 퇴행적 문화 행정이 반복되리라고 예상했다. 이 기조 속에서 “앞뒤 눈치 안 보고 시키는 대로 나설 사람”이 유 후보자라는 것이다.

유인촌 장관은 역대 최장수 문체부 장관이다. 2008년 2월부터 2011년 1월까지 재직했다. 이 시기 이명박 정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운용했다. 2019년 문체부가 발간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진상조사위) 백서’에 따르면 “반정부적 문화예술인에 대한 사찰·검열 시도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시기에 시작됐다. (중략) 박근혜 정부 때까지 사찰과 검열, 지원 배제 등 부당한 대우를 받은 피해자는 8931명, 단체는 342개에 달한다.” 블랙리스트의 큰 그림을 그린 것은 청와대다. 2008년 8월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에서는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좌파가 “문화권력화”되어 “국민의식이 좌경화”된다며, “자금을 우파 쪽으로만 배정하고 문화예술인 전반이 우파로 전향하도록 추진”하는 체계를 만들겠다고 했다. 국가정보원은 이를 실행에 옮겼다. 반정부 성향 좌파 문화예술인 명단을 작성한 뒤 이들을 사찰하고, 온라인상에서 비방하는 등 여론전을 폈다.

2009년 이명박 정부 시절 유인촌 당시 문체부 장관이 1인 시위에 나선 한예종 학생과 논쟁을 하고 있다. ⓒ시사IN 포토
2009년 이명박 정부 시절 유인촌 당시 문체부 장관이 1인 시위에 나선 한예종 학생과 논쟁을 하고 있다. ⓒ시사IN 포토

유인촌 후보자는 블랙리스트 운용 책임에 대해 징계받거나 처벌받지 않았다. 지난 8월 그는 블랙리스트 관련 비판에 대해 “내가 장관 할 때 지원 배제 명단이나 특혜 문건은 없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에는 “문체부 공무원이나 지원기관 직원들이 상당한 피해가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다시 잘 들여다보겠다”라고 말했다. 박선영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은 ‘명단’의 존재를 몰랐다는 유 장관 주장을 받아들여도 그의 책임은 남는다고 말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물리적인 명단’으로 이해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 소장은 진상조사위 백서의 정의를 인용했다. 여기서 블랙리스트란 “집권 세력이 공적 또는 비공식적 수단으로,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정치적 견해가 다른 문화예술인들을 사찰·감시·검열·배제·통제·차별하는 등 권력을 오남용”한 행위다.

유인촌 후보자의 재임 시절, 당시 문체부는 전임 참여정부에서 임명된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 기관장들을 무리하게 교체했다. 당시 문체부는 이들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회유·압박했다. 여기 응하지 않으면 ‘근무지 무단이탈’ ‘비싼 값에 작품 매입’ 등 사소한 구실을 잡은 뒤 해임 절차를 밟았다.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황지우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총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이 표적이 되었다. 부당한 행정행위였다. 해임 결정에 대해 취소·무효 청구 소송을 제기한 세 사람 모두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가볍게” 시도한 기관장 길들이기

기관장 교체에 대해 유 후보자는 “서울시장이 이명박에서 오세훈으로 바뀌었을 때 서울문화재단 대표였다. 같은 보수당이라도 새로운 시장은 새로운 사람과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의를 표했다. 장관이 됐을 때도 그런 맥락에서 가볍게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8월28일 〈조선일보〉). 진상조사위 백서의 평가는 다르다. “이명박 정부 블랙리스트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 초기 유인촌 문체부 장관을 중심으로 소속기관들에 대한 조직 장악, (중략) 공공기관 자율성을 일상적으로 침해하고 관리·감독할 수 있는 정책 구조와 조직문화를 새로 확립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 장관이 “가볍게” 시도한 기관장 길들이기야말로, 보수 정부 9년간 이어진 블랙리스트의 정지(整地) 작업이었다.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대응 연대체인 ‘블랙리스트 이후’의 정윤희 디렉터는, “블랙리스트는 근본적으로 인권침해다. 단순히 직위나 경제적 혜택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트라우마를 남긴다”라고 말했다. 트라우마는 사찰과 감시의 공포만 의미하지 않는다. ‘모멸감’이 남았다. 정 디렉터는 이렇게 말했다. “블랙리스트 실행자들은 예술에 대한 조롱을 가했다. 문체부 공무원이나 국정원 관계자가 찾아와 ‘당신 작품은 이러이러해서 문제다’라고 면전에서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9월21일 정윤희 디렉터가 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유 장관 내정 철회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9월21일 정윤희 디렉터가 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유 장관 내정 철회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유 후보자는 9월14일 청문회 준비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정부와 문화계가 대립적으로 가는 것은 국민 미래를 위해 불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8월28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그는 일종의 ‘탈이념’을 지향하는 듯했다. “좌파 예술인도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술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 건 공산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선영 소장은 “예술이 ‘정치적 도구’여서는 안 되지만 ‘정치·사회를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를 배제한 예술만 순수하고 가치 있다는 시각은 세계적으로 폐기됐다”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개인 간의 예술관 차이다. 이 인터뷰 다음 대목에서 유인촌 특보는 ‘국가’를 대표하려 한다. 그는 ‘성향에 따라 국가가 판단해 차별 지원한다’는 블랙리스트의 핵심 개념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설파했다. “(좌파 예술인이) 굳이 정치적 표현을 하고 싶다면 말릴 수 없다. (중략) 다만 정부 예산을 지원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나.” 9월14일 첫 출근 자리에서 이 대목에 대해 질문을 받자 유 후보자는 “(문화예술인) 지원 정책을 완전히 새로 다시 바꾸고 고쳐보려 한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반대 성향 작품에 대한 의견인지 묻자 “그런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답했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천명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자선사업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냉정한 정책적 판단이었다. 비전문가인 국가권력이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예술이라고 해서 배척하면, 결과적으로 사회의 문화 역량을 해친다는 역사적 교훈을 받아들인 것이다. 대다수 외신은 한류의 세계적 흥행 뒤에 김대중 정부 이후 표현의 자유 확대 정책이 있다고 진단한다. 박선영 소장은 유인촌 장관 후보자의 최근 발언이 시대 흐름에 역행한다고 말했다. “유인촌 후보자는 누군가를 ‘지원해선 안 된다’고 하는데 판단 기준이 없다. ‘좌파’가 누구인지, 누가 정치적 표현을 일삼고 ‘국가 이익’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 기준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고, 무지한 백성은 관여하지 말라는 것처럼 보인다.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 문화 수장에게 적합한 태도인지 묻고 싶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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