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기획사 '어트랙트' 소속의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 ⓒ어트랙트 제공
중소 기획사 '어트랙트' 소속의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 ⓒ어트랙트 제공

시작은 미미했다. 지난해 11월, 4인조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가 데뷔했다. 국내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해외 반응이 뜨거웠다. 노래 ‘큐피드(Cupid)’로 데뷔 134일 만에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에 진입한 게 신호탄이었다. 데뷔 이후 가장 최단 시간에 ‘핫 100’ 차트에 든 케이팝 그룹, 가장 높은 순위(8주 차 17위)까지 올라간 케이팝 걸그룹 단독 곡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썼다. 영국에서는 오피셜 차트 ‘톱 10’에 든 첫 케이팝 걸그룹이 됐다. 6월5일에는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포티파이’에서 블랙핑크를 밀어내고 월별 청취자가 가장 많은 케이팝 걸그룹 역대 1위를 차지했다. 케이팝 그룹 전체로 따지면 BTS에 이은 2위다.

피프티 피프티가 놀라움을 준 건 단지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하이브나 SM, JYP, YG 등 소위 ‘빅 4’ 기획사가 아닌 중소 기획사 소속 걸그룹이 낸 성과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소속사 ‘어트랙트(ATTRAKT)’ 역시 2021년 6월 문을 연 신생 기획사다. 가수 유열의 매니저 출신으로 가수 바비킴, 윤미래 등을 키워낸 전홍준 대표(59)가 만든 곳이다. 전 대표는 피프티 피프티의 싱글 1집 실물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 10년간 찼던 롤렉스 시계를 망설임 없이 중고로 팔았다며 그룹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피프티 피프티는 ‘중소돌(중소 기획사+아이돌)’로 불리며 흥행을 이어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5월5일자 기사에서 그들의 성공 요인을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틱톡 댄스 챌린지라고 분석하면서 그룹을 프로듀싱한 안성일 더기버스 대표(49)의 말을 인용했다. “멤버별로 차별화된 자질을 키우고 맞춤형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강점을 살린 곡을 직접 선곡하는 데 2년을 바쳤다.”

안성일 대표가 운영하는 더기버스는 어트랙트로부터 외주 용역을 받은 프로듀싱 업체다. 어트랙트가 자금을 대고 전반적인 관리를 한다면, 더기버스는 연습생을 선발한 뒤 그룹의 콘셉트를 정하고 곡을 만들어 트레이닝시킨 다음 홍보하는 역할까지 두루 맡는다. 대형 기획사처럼 인하우스 시스템(사무실·녹음실·연습실 등이 한 건물에 있어서 모든 과정을 직접 할 수 있는 체계)을 갖추고 있지 않은 중소 기획사가 용역을 맡기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그룹이 BTS처럼 빛을 본다면 소속사는 중소 기획사 규모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고, 안 대표는 “피프티 피프티의 곡을 만든 사람”으로 함께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하지만 성공을 향한 동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6월23일, 소속사 어트랙트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외부 세력이 당사에 대한 중상모략을 통해 소속 아티스트들이 잘못된 판단을 하여 전속계약을 무시하고 자신들과 계약을 체결하도록 유도하는 불법적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정황을 발견했다며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피프티 피프티 멤버들은 소속사 어트랙트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이후였다. 어트랙트는 ‘외부 세력’으로 용역업체인 더기버스를 지목했다. 한마디로 용역업체가 멤버들을 빼가기 위해 소속사를 배신했다는 주장이다. 전 대표는 안성일 대표를 포함해 더기버스 측 인물 4명을 사기 및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소했다.

어트랙트 측은 의혹의 증거로 전홍준 대표와 워너뮤직코리아 윤 아무개 전무와의 통화 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윤 전무가 “(더기버스) 안성일 대표한테는 전에 바이아웃(아티스트, 저작권 등을 통째로 사들이는 계약)을 하는 걸로 200억 제안을 드린 게 있다”라고 말하자 전 대표는 “못 들어봤다. 바이아웃이라는 게 뭔가?”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어트랙트는 음모의 배후가 워너뮤직코리아가 아닌 더기버스인 점을 명확히 했다. 더기버스가 중간에서 소속사의 승인 없이 바이아웃 계약을 진행하려 했다는 것이다. 더기버스 측은 불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려 한 적 없다며 어트랙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여론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건 히트곡 ‘큐피드’의 저작권에 얽힌 문제가 불거지면서부터다. ⓒ연합뉴스

데뷔 7개월 만에 전속계약 해지?

여론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건 히트곡 ‘큐피드’의 저작권에 얽힌 문제가 불거지면서부터다. ‘큐피드’는 안성일 대표가 스웨덴 음악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만든 곡을 사서 편곡한 노래인데, 안 대표가 서류 조작을 통해 저작권에 대한 자신의 지분을 12.5%에서 95.5%로 높였다는 의혹이 나왔다. 여기에 멤버들이 소속사인 어트랙트 몰래 그룹의 한글 이름 ‘피프티 피프티’와 각자의 활동명(아란·키나·새나·시오)을 상표권 등록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자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하필 상표권 등록 신청을 한 날이 멤버들이 법원에 전속계약 해지 가처분 신청을 낸 당일이었다. 멤버들은 '소속사가 자신들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활동을 강행했고, 정산을 투명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속계약을 해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어트랙트 측에서 공개한 안성일 대표와의 메시지 내용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소속사에서 멤버들의 건강을 챙기지 않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아 보인다. 활동한 지 7개월밖에 되지 않은 멤버들이 투자금도 회수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익 배분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멤버들이 소속사와의 계약을 끝내려고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한 음악평론가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계약과 관련된 시비는 법원에서 가려질 문제'라고 말을 아끼면서도 “18세에서 21세 사이의 젊은 멤버들이 한번 세계적인 히트를 치고 나자 60대에 가까운 중소 기획사 대표가 그룹을 잘 이끌고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 와중에 기획사 대표보다 심리적으로 가까운 안 대표의 말을 더 신뢰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5년 넘게 국내에서 음악 작업을 해온 한 프로듀서는 “그렇다고 선은 넘지 말았어야 했다. 이번 사건으로 업계 관계자가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상황이 올까 봐 걱정된다. 이건 상도를 떠나 계약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7월5일 한국연예제작자협회는 “기회주의적 인재 가로채기는 케이팝의 근본을 일궈낸 제작자와 아티스트 성장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어트랙트를 지지하고 나섰고, 7월18일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는 “이번 사태가 업계 발전과 변화의 과도기적 현상으로 그치기를 바란다”라며 원만한 해결을 촉구했다. 차우진 음악평론가는 “연예계라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만, 사실 어느 업계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중소 기획사에서 단 한 곡으로 시장을 뚫을 수 있다는 점, 앞으로도 이런 곡들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성과인데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피프티 피프티의 ‘중소돌’이라는 별명은 ‘통수돌(뒤통수 친 아이돌)’이라는 조롱으로 바뀌었다. 현재 각종 광고 촬영은 물론이고 할리우드 영화 〈바비〉의 OST 뮤직비디오 촬영, 한·영 수교 140주년 기념 런던 공연 참가 등도 줄줄이 취소된 상황. 전홍준 어트랙트 대표는 “법원에서 판결이 나면 그때는 회사가 보듬어줄 수 없다”라며 그 전에 멤버들이 대화에 나서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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