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미드소마〉로 '현대 호러 마스터'로 불리는 아리 에스터 감독이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다. ⓒ시사IN 조남진

“이 영화제가 외롭고 이상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영화제를 아주 외롭고 이상한 남자가 등장하는 영화로 시작하게 되어 정말 기쁘다.” 아리 에스터 감독이 6월29일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개막식 무대에 오르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의 세 번째 장편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BIFAN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전작 〈유전〉과 〈미드소마〉로 ‘현대 호러 마스터’란 타이틀을 거머쥔 감독의 첫 내한인 만큼 영화제 개막식 열기도 뜨거웠다.

함께 무대에 오른 신철 BIFAN 집행위원장도 기대감을 드러냈다. “오늘 이 개막식이 열린 것도, 아리 에스터 감독을 모신 것도 대단히 기적적이었다. 〈유전〉과 〈미드소마〉로 전 세계를 흔들어놨던 감독을 지난 4년 동안 초대하고 싶었는데 못하다가 올해 기적적으로 모실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내리던 장마철 폭우도 저녁 6시 즈음 잦아들었다. 궂은 날씨에도 수천 명이 개막식이 열리는 부천시청 잔디광장을 빼곡히 채웠다. 배우와 감독들이 마스크 없이 레드카펫을 밟는 것도 지난해와는 달라진 풍경이다.

개막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감독의 말처럼 ‘외롭고 이상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2020년 영화 〈조커〉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호아킨 피닉스가 맡아 화제가 됐다. 편집증에 시달리는 중년 남성 ‘보’가 그를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엄마 ‘모나’를 만나러 가는 초현실적인 여정에 관한 영화다.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보의 여정은 ‘여기가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저분하고 폭력적인 도시에서 시작되는데, 마치 어린아이 같은 주인공은 외부의 위협에 속수무책일 따름이다. 내가 틀지도 않은 음악 때문에 이웃에게 비난받고, 늦잠을 자다 비행기를 놓치고, 열쇠를 잃어버리는 일이 이렇게도 무서운 일일까? 상영 시간 3시간 내내 관객은 누군가의 악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오는 7월5일 국내 개봉한다. ⓒBIFAN

지난 4월 미국에서 개봉됐을 때부터 문제작이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3년 만의 신작이었기 때문이다. 〈유전〉, 〈미드소마〉 영화 두 편 만으로 1986년생 감독은 현대 공포 영화 장르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 중 한 명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관객을 갑작스럽게 놀래키는 ‘점프 스케어’도 없고, 현실적인 비극을 모사하지도 않는데도 다분히 공포스럽고 불편하며 께름칙해서다. 특히 그의 작품 안에서 가족은 공포의 원천이다. 다소 뒤틀린 관계 속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된 주인공이 분투한다. “가족은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유일한 관계다. 우리가 친숙하게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족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지 탐구해 왔다.” 그의 영화에 ‘아트 호러’ 혹은 ‘현대 호러’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정작 감독 본인은 호러보다는 블랙 코미디임을 강조한다. 지난 6월27일 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언론 시사회에서 아리 에스터 감독은 이번 영화를 “겁에 질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이야기이자, 내가 좋아하는 유머를 듬뿍 넣은 블랙코미디”라고 말했다. 12년 전 처음 썼다가 서랍 속에 두었던 원고를 〈미드소마〉 작업이 끝나고 다시 꺼냈다. 코로나19 덕분에 원고에만 집중해서 수정을 마칠 수 있었다. 〈미드소마〉가 북유럽 민속과 영적 세계관에 바탕했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오이디푸스와 메데이아 신화 같은 그리스 비극이 엿보인다. 외신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두고 “광란의 프로이트적 오디세이(BBC)” “3시간의 불안 코미디(〈가디언〉)” “그의 작품 중 가장 분열적인 작품(〈타임〉)”이라고 평가했다. 전작에 비해 호불호가 명확히 나뉘는 모양새다.

한국을 찾은 아리 에스터 감독은 신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 대해 “가장 나다운 영화"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국내에서도 이미 두터운 팬층을 보유했다. 6월29일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진행된 BIFAN 아리 에스터 감독 마스터클래스도 채 1분도 안 돼 전석 매진되었다. 언론 시사회를 제외하면 한국 관객과는 처음 만난 자리였다. “감독님 어머니가 이번 영화를 보시고 어떤 반응이었나요?” “도대체 다락방과 어떤 악연이 있는 건가요?” 등등 객석에서 질문이 쏟아졌다(그의 영화에는 늘 엄마와 다락방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아리 에스터 감독은 차분히 대답을 이어갔다. “저희 어머니는 영화 좋아하셨다” “저희 집에 따로 다락방은 없다. 다락방 장면은 공포를 자아내기 위해 만든 장면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전작에 대한 패러디로 사용했다.” 이토록 기이한 영화를 만드는 영감이 무엇이냐는 한 관객의 질문에 아리 에스터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잘 모르겠다. 다만 늘 스스로를 웃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상황이 어떻게 되면 더 잘못될 수 있을지 상상하곤 한다.”

배우 최민식, 안성기, 박중훈씨가 지난 6월29일 열린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을 찾았다. ⓒ시사IN 조남진

한국 영화에서 영감 얻어

그는 한국 영화의 오랜 팬이기도 하다. 과거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에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언론시사회와 마스터클래스에서도 좋아하는 한국 영화에 관한 질문이 이어진 까닭이기도 하다. 고전 영화 〈오발탄〉을 좋아한다는 그는 김기영, 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 장준환, 나홍진 감독의 이름을 하나씩 거론하며 감독들의 영화로부터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최근 30년만 보면 한국 영화에는 특징이 있다. 장르의 해체가 과감하고 영화적 언어는 세련됐으며 유머도 있다. 규칙을 따르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한국 영화에서 배웠다.” 아리 애스터 감독은 자신의 제작사 스퀘어 페그를 통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 영화도 제작에 나선다.

호러 마스터의 개막작으로 시작된 BIFAN은 7월9일까지 11일 동안 열린다. 올해 슬로건은 ‘이상해도 괜찮아(Stay Strange)’. 배우 특별전 ‘최민식을 보았다’, 전 세계 호러영화의 주된 경향인 포크 호러를 집중 조명하는 ‘포크 호러 특별전’ 등 다수 프로그램이 예정돼 있다. 올해 영화제에는 51개국 장·단편 영화 262편이 상영된다. 7년째 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지영 감독은 이번 BIFAN을 두고 “조금은 삐딱하고 남다른 영화들을 모았다”고 소개했고, 신철 집행위원장은 “가장 미래지향적인 영화제로 나아가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하루 종일 내린 비로 개막식 야외 잔디가 질퍽했지만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해가 지고도 이어졌다.

무대 위에 선 아리 에스터 감독은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제 영화는 3시간 동안 상영될 예정이니 그 전에 화장실을 가실 것을 적극 추천한다. 이 영화는 호불호가 확실한 영화다. 관객 반응이 말 그대로 쫙 갈릴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파가 나뉜 상태에서 싸우시길 바란다. 그리고 영화가 좋다고 하는 분들이 반드시 이겼으면 좋겠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꼭 극장에서 봐달라, 넷플릭스 말고.” 그가 “가장 나다운 영화"라고 했던 신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도 7월5일 극장에서 개봉한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부천시청 잔디광장에서 열렸다.ⓒ시사IN 조남진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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